인간의 역사는 자연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는 자연과의 분리의 역사이다. 자연으로부터 멀어질수록 보다 문화적인 삶을 이루어 왔다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시골은 자연과 가까운 만큼 문화에서 멀어져 있고 도시는 문화를 보다 더 가깝게 향유할 수 있는 곳이다. 이처럼 자연이 무위라면 문화는 자연의 인위적 조작인 작위인 셈이다. 따라서 문화는 자연을 거스르는 반자연이고 자연의 훼손과 다를 바 없다. 실제로 문화(culture)라는 말의 어원은 황무지나 숲을 갈아 엎어 농경지로 구획정리하는 '경작하다'라는 말에서 나왔다. 예컨대 농업(agri-culture)이라는 말은 땅의 경작, 땅의 문화라는 말이다. 따라서 문화란 아름다움을 추구하든 편리를 추구하든 간에 자연의 본래 모습을 변형시키는 이른바 성형수술인 셈이다.
 
성형수술도 유행과 이데올로기의 지배를 받는다. 한 때는 김 아무개가 제일 예쁜 사람의 대명사였다가 근자에는 최 아무개로 바뀌고 앞으로 또 어떤 사람으로 바뀔지 모른다. 거기다 대중의 변덕스런 취향 때문에 표준 설정의 어려움마저 있다. 매번 달라지는 미의 기준을 좇아가려면 수술비용도 만만치 않다. 설령 수술비용에서 자유롭더라도 성형은 회를 거듭할수록 원래 모습에서 점점 더 멀어개 한다. 게다가 신축에서 개축으로 넘어가면 변형할 수 있는 선택의 폭도 그만큼 더 좁아진다. 그러니 눈물을 머금고 적당한 선에서 그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얼마 만큼이 적당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인간 욕구는 언제나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욕구불만의 순환구조로 되어 있다.
 
모든 설계는 시대정신에 지배받기 마련이다. 또한 설계가 아무리 최신형이고 시공이 아무리 잘 되어도 인공물이란 날이 갈수록 노후해지고 구식이 될 수밖에 없다. 만약 수술 또는 시공이 부실하기라도 하면 더더욱 낭패다. 뒤늦은 후회 속에서 차라리 원래 모습으로 복원해 달라고 요구하지만 그것도 성형을 통해서만 실현이 가능하므로 돈 잃고 희망마저 잃기가 십상이다. 어느덧 몸과 맘이 깊은 상처를 입고 피폐해져 자신이 처한 현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초현실이 된다.
 
여기서 벗어나려면 우선 성형의 신화를 들추어 그 우상을 파괴해야 하며, 그런 다음 제대로 된 성형 문화를 재확립해야 할 것이다. 성형은 결국 자연의 훼손이요 건강한 본래의 자연에 엄청난 타격을 입힌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그것은 자신의 본래 모습이야말로 가장 자연스럽고 아름답다는 자존심의 회복이며, 누구도 닮지 않은 본래의 고유성이 최고라는 원형의 우월감을 되찾는 일이다.
 
무위자연이라는 우리 선조들의 자연관에서 자연과 문화가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할 수 있다. 문화가 자연에 대한 작위요 성형이라면 문화는 자연에 대한 최대한의 경외감을 지녀야 한다. 문화는 자연에 대해 최소한의 변형을 가하는 조심성과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은 문화가 자신의 모태인 자연을 잊지 않는 것이며, 자신은 결국 자연을 변형시킬 뿐이지 자연을 만들어낼 수 없다는 자기 정체성을 깨닫는 것이기도 하다.
 
문화의 문화됨, 즉 성형 문화의 자기 정체를 깨닫는 일이야말로 우리시대의 화두인 몸을 제대로 파악하는 작업이 될 수 있다. 또한 그 몸이란 것이 결국 마음과 유리되어 있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을 통해 마음의 바른 모습까지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를 우리가 간과할 때 성형 문화는 판으로 찍어낸 이상한 플라스틱 꽃의 문화로 귀결되고 말 것이다. 그것은 자신에게 맞지 않는 이상한 몸을 이식시킨, 이상한 이데올로기에 희생되고 점령된 문화, 즉 강간과 수욕의 문화가 될 수밖에 없다.
 
김해 신도시에서는 천문대 뒤로 두둥실 떠오르는 한가위 달도 아파트 밀림 숲에 가려 보이지 않는 게 현실이다. 가야문화의 얼굴인 김해가 얼마만큼 자연으로부터 멀어진 성형미(美)를 갖추고 있는지, 이제는 되돌아 봐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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