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진 시인·동아대 명예교수.

지난 15일은 광복절이었습니다. 집집이 태극기를 잘 달았을까요? 국가기념일이며 국경일에 대도시 아파트의 태극기 다는 집 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는 얼마 전의 언론보도를 생각하며 산책에 나섰습니다. 우리 촌동네 사정도 보도와 별 다르지 않습니다. 2개 마을을 지나고 샛강을 에둘러오는 내 산책길. 국기 걸린 집은 몇 되지 않았습니다.
 
손수 가꾼 배추 먹어보라고 주던 김 반장 댁, 복분자를 수확하다 한 주먹씩 쥐어주던 과부 아지매, 그들의 집 앞에는 그래도 태극기가 팔락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황폐하던 땅을 순식간에 화려한 화원으로 꾸며내고는 코빼기도 내놓지 않는 전직 고급관리 댁, 어마어마한 크기의 병원장 댁에는 태극기가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대문간에 고급 승용차를 내놓은 귀촌인(?)들의 새 집들은 대개 국기와는 무관한 표정들입니다. 세계인이고 자유인들인지라 국기 게양 정도는 생략하고 사는 걸까요?
 
태극기를 빌미로 애국심을 따지자는 건 아닙니다. 국기를 단다고 해서 애국심이 높다 할 수도 없는 일이고요. 또, 어느 진보 결사체의 모임처럼 북한을 포기한 남한만의 국기는 게양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시라면, 그도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하겠습니다.
 
미운 건 사회적 혜택을 많이 받아온 이들의 기회주의적 심보입니다. 자기에게 필요할 때는 애국심이니 상부상조니 들먹이던 사람들이, 조금 귀찮다고 해서, 당장 덕 볼 것 없다고 해서, 국경일, 국가기념일에 국기 게양을 않는다면, 그건 오만과 위선을 표 나게 걸어두는 짓에 다름이 아니지 않을까 합니다.
 
국기 달기란 삶의 스케일이나 애국심 이전에 이웃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의 표시가 아닐까요? 자주 만나지 못하는 집들끼리 가끔씩 같은 깃발이라도 펄럭임으로써 최소한의 신뢰와 감사의 마음 전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지금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해도 그건 자기 능력에 따른 결실이기 보다, 거의 남의 덕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웃의 인내와 양해와 격려로 간난을 이겨왔고, 지금 잘 살고 있는 것이니까요. 세계 최고급의 대접을 받으면서 가장 비능률적인 파벌 정치를 일삼는 정치인들. 회사는 망해도 떼돈 챙기는 경제인들, 혈세 낭비하고 잇속 챙기기에 급급한 관리며 법조인들, 모다 이웃의 은혜를 망각하고 남을 이용의 대상으로나 여기는 악습에 절은 까닭이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크고 작은 공동체 속에서 삽니다. 함께, 더 큰 내가 되려면 당연히 불편을 감수하는 협동의 마음부터 익혀야 합니다. 협동이란 남의 것으로 내 것을 늘려가는 협잡이 아니라, 나를 남에게 합당하게 쓰는 일입니다. 나에게 하듯 남에게 하다 보면 내 것이 남의 것이 되고 나아가, 남의 것이 다 내 것이 될 것입니다. 그 때야말로 평안과 건강으로 마음이 해방되는 때가 아닐까 합니다.
 
자기가 사는 마을은 자꾸 개발되어서 집값, 땅값이 올라야 하고, 쓰레기장, 장애인시설, 핵폐기물 저장시설 같은 혐오시설은 마땅히 남의 마을로 보내야하는 심사, 남의 마을은 개발이 제한되어서 환경을 살리는 허파 구실을 해야 한다면서, 자신은 생태환경 파괴행위를 밥 먹듯 되풀이 하는 비양심, 이런 심사가 공동체 의식을 파괴합니다. 경향 각지에서 시도 때도 없이 열리는 축제, 문화제, 영화제, 문학제, 음악회, 전시회, 그리고 일 년 내내 이어지는 축구, 야구, 농구, 배구 등 프로 스포츠 경기. 그들 보다 우선시 돼야 할 일이 많습니다. 빈부격차를 해소하고, 교육, 성장, 인권실현의 기회가 실질적으로 평등하게 이루어지는 데 합의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런 기원의 마음을 청마 유치환의 시 '깃발'은 누군가를 향한 소리 없는 아우성'이요, '저 푸른 해원을 향한 영원한 노스텔지어의 손수건'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남 생각하란다고 세상 일 일일이 아는 척하며 감 놓아라 배 놓아라 참견하란 말은 아닙니다. 모르는 일은 모른다고 해야 합니다. 아는 척 나서기보다는 분수를 지키는 것이 남을 존중하며 사는 이의 태도일 것입니다.
 
정해진 날만이라도 태극기를 펄럭입시다. 사는 레벨이 다르고 집 크기가 다르고 응원하는 스포츠팀은 다를지라도, 정해진 날만이라도 같은 깃발 함께 날리며 서로 열고 다가갑시다. 그 작은 성의가 마음의 해방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 수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김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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