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여름 뙤약볕도, 거센 폭우도, 온몸으로 헤쳐가며 자라고 있는 김해들판의 나락.  
김병찬 기자 kbc@
나는 김해들판의 벼다 …
나는 청동기시대부터 지금까지 이곳에 있었다
그 넓고 넉넉했던 들판이 이제는
대동들과 칠산·화목들만 남았지만
여전히 이곳에서 '백성의 하늘, 밥'이 되기 위해
한여름 땡볕과 싸운다

"서마지기 이논배미 모를 심어서 영화로다. 우리야 부모님 산소등에 솔을 심어서 영화로다. 아래웃는 못꾼들아 춘삼월이 어느때고. 우리야 부모님 길 떠날때 춘삼월로 올라드네." 이 노래를 기억하는가. 마사리 안상분 할머니(75)가 기억하는 모내기 노래다. 인제대학교 문화사업단이 김해의 구전민요를 채록할 때 안 할머니의 기억으로 되살려 낸 귀한 노래다. 나는 농사를 짓는 사람들의 희노애락이 담겨 있는 노래들을 들으며 못자리에서 논으로 옮겨져 자라고 있다. 모심기가 끝난 김해들판을 보았는가. 거기에 내가 있다. 나는 하늘의 빛과 땅의 기운을 받고 자라 이 땅 사람들의 밥이 된다.


내가 이 땅에서 사람들과 얼마나 오래도록 함께 했는지는 역사가 말한다. 청동기시대부터 지금까지 나는 이곳에 있었다. 삼국유사의 '가락국기'는 기록하고 있다. "신답평에 왕도를 정했다"고. 답평은 논실을 일컫는다. 논이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다. '논실'이라는 주제어로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알 것이다. 대한민국 방방곡곡에 '논실'이라는 지명이 얼마나 많은지. 김해의 논실은 대성동과 봉황동이다. 대성동에 살았던 사람들은 논실이라는 지명을 기억할 것이다. 가락국기에서 말하는 신답평, 즉 새논실은 봉황동을 말한다. 봉황동유적지 발굴 때 6세기에 존재했던 '논'이 세상의 빛을 다시 보았던 일은, 당시 발굴에 참가했던 사람들을 숙연케 했다. 아마 사람들은 수천 년 밥을 먹어 온 숭고한 역사를 몸으로 느꼈을 것이다. 김해 사람들이 아는 논실은 수세기 동안 이어져 온 나의 또 다른 이름이다.

▲ ▲ 김해평야는 강원도 태백 황지에서 발원하여 남해바다로 달려오는 낙동강 하류에 형성된 퇴적 삼각주로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곡창지대였다. 김해가 인구 50만의 도시로 성장하는 동안 넓고 넉넉했던 들판이 난개발과 도시화로 절반 너머 사라지고 이제는 대동들과 칠산·화목들만이 남아 있다. 그러나 황금들판을 약속하는 한여름의 김해들판엔 초록빛 생명이 가득하다.  
김병찬 기자 kbc@gimhaenews.co.kr

 
가야, 통일신라, 고려, 조선을 거쳐 인구 50만의 도시에 이른 이곳 김해는 한 때 김해평야로 유명한 땅이었다. 낙동강 하류의 퇴적 삼각주라는 천혜의 자연조건으로 이 나라의 대표적인 곡창지대였다. 끝이 보이지 않는 들판, 아니 초록빛의 바다라고 해도 될 만큼 넓고 큰 땅이었다.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김해시와 부산 강서지역을 포괄하여 동서 너비 6~12km, 남북 길이 약 20km, 전체면적이 1만3000여 ha에 달하는 광대한 그 땅이 바로 나였다.
 

강원도 태백 황지에서 발원하여 바다로 달려오는 낙동강이 실어 온 기운을 받은 기름진 땅은 개발과 도시화의 광풍에 휩쓸려 사라져 갔다. 더이상은 평야라는 이름을 붙일 수가 없게 되었다. 그 넓고 넉넉했던 들판이 사라지고 이제는 대동들과 칠산·화목들이 남아 있을 뿐이다. 나의 형제, 사람들의 밥이 3분의 2는 그 생명을 다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사람들 곁에 있다. 변함없이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다. 모에서 벼로, 쌀로, 밥으로 다시 태어나며 나는 수세기 동안 새로운 생명을 이어간다.
 
못자리에서 길러진 나는 논으로 옮겨진다. 마침내 내 자리에 온 것이다. 뜨거운 태양열을 온 몸으로 받아내며 벼로 익어 가야 한다. 농부들도 마찬가지다. 생철리 성포부락 이을선 할머니(86)의 모내기 노래는 눈물겹다. "소주도 고코 약주 고코 국화정자 놀러가자 우리도 언제 한량되어 국화정자 놀러가꼬". 알곡이 여물 때까지 남은 일이 태산이고 보릿고개 넘길 일이 큰 걱정이었던 그 마음이 세월이 지난 지금도 내게 와 닿는다. 그러나 모내기를 끝낸 논은 다가올 황금들판을 약속하기에 그들은 기껍고 흐뭇했다.
 
임호산 흥부암 위 전망대에 올라와 나를 바라보며 땀을 훔치는 사람들 마음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들은 나날이 변해가는 김해 시가지 쪽을 보며 "정말 많이 발전했다"고 말하다가도 이내 들판을 바라본다. 나를 보는 그들의 심정은 바람을 타고 전해온다. "저 초록 들판 좀 봐. 마음이 탁 트이네. 아직까지 그래도 김해들판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구나"하는 말이 바로 앞에서 말하는 듯 들린다.
 
옛말에 논에 물들어가는 것과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것이 가장 보기 좋다는 말이 있다. 생명을 유지하는 귀한 먹거리, 쌀을 생산해야 하는 나는 그래서 내 할 일을 피하지 않는다. 폭우가 쏟아져 뿌리째 흔들려도 온 힘을 다해 버틴다. 나를 일으켜 세우려고 애를 쓰는 농부들과 함께. 한여름 찌는 듯한 땡볕이 내려쬐어도 고스란히 받아들인다. 아니, 처음부터 피할 곳도 없다. 논 위에 그늘막을 치는 것을 본 일이 없을 것이다. 나는 비와 땡볕, 바람, 빛과 어둠을 모두 내 몸 속에 저장하는 운명을 타고 났다.
 
▲ 나락도 메뚜기도 서로 닮은 초록색이다 .
모내기가 끝난 후부터 알곡이 여물 때까지 뜨거운 햇살을 피하지 않고 있는 나를 눈여겨 본 시인이 있었다. 경주로 볼일을 보러 가던 최영철 시인은, 한 여름 내내 알알이 여물고 가을을 맞은 논을 보며 '화엄정진'이라는 시를 썼다.
 
'함월산 기림사 가는 나무 그림자 / 가는 길에 잠깐 발 멈추고 섰다 // 오랜만에 내리는 가을 한나절 / 땡볕을 맞고 있는 나락들 // 땀 좀 식히라고 멈추어준 / 나무 그늘의 등을 / 한사코 밀어낸다 // 뜨거운 총탄 세례 / 이 불구덩이 형벌을 막지 말라고'.
 
뜨거운 총탄 세례, 맞다. 얼마나 뜨거운지 알고 싶다면 하루 종일 나와 함께 들판에 서 있어 보라. 불구덩이 형벌, 맞다. 그러나 그 끝에 오는 희열을 수세기 동안 보아왔기에 나는 기꺼이, 달게 견딘다. 농부들과 함께 말이다. 농사는 온 세상 사람들이 생활해 나가는 근본이라는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말을 기억하면서.
 
시인은 이 시를 읽는 독자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한여름 땡볕은 우리가 뭔가를 배우고 힘든 과정을 헤쳐 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을 피하면 아무것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저 나락들은 뜨거운 햇볕을 견딘 뒤에 비로소 알곡이 여무는 겁니다." 내 마음을 알아주던 시인은 김해 도요마을에 살고 있다.
 
▲ 논고동과 미꾸라지를 잡아 먹고 있는 황새.
메뚜기가 찾아왔다. 나와 몸 색깔이 똑 같다. 폴짝 폴짝 뛰어다니다 내게로 와 앉았다. 그 자리가 간지럽다. 몸피가 가녀린 아기 잠자리도 날아왔다. 몇 마리가 날아와 앉아도 무게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가벼운 날갯짓이다. 논바닥에는 논고동이 뽀골거리는 거품을 만들고 있고, 미꾸라지가 꼬물거린다. 논고동과 미꾸라지를 노리는 황새가 나타나면 어디론가 숨어보려 애쓰지만, 황새는 한 치의 양보도 없다. 나는 그들 모두와 어울려 살고 있다. 심지어 내 옆에는 자리를 잘못 찾아온 피도 함께 자란다. 곧 뽑혀나가겠지만.
 
들판 옆을 달리는 차량의 경적 소리에 황새가 푸드득 날아오른다. 초록 들판 위에 흰 날개짓을 펼치는 황새를 따라 나도 저 들판 끝까지 바람과 함께 우수수 달려간다. 바다에 이는 물결처럼 푸른 모들이 일제히 술렁인다. 비가 내리고 햇볕이 내리는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지 않는 김해들판이 말하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온 세상에 퍼져나간다. "이것은 인간의 일이며, 또한 하늘의 일이다."
 
얼마 후면 김해들판은 황금빛으로 물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나는 사람들의 밥이 될 것이다. 이 땅의 착한 백성들이 가장 존경하는 세종대왕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밥은 백성의 하늘이다"(食爲民天)라고.
 


◆ Tip 삼국유사 가락국기 기록 '신답평에 왕도를 정했다'

▲ 봉황동유적지에서 출토된 6세기 논의 모습.
벼농사는 지금부터 약 1만 년 전에 아시아 대륙의 남부 및 남동부의 인도와 인도차이나 반도의 열대·아열대지방에서 시작되어 다른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벼의 재배법은 중국에서 발달되기 시작하여 동남아시아 및 다른 지역으로 전파되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세계에서 벼농사를 가장 많이 짓고 있는 나라는 인도이며, 다음이 중국이다. 아시아의 벼 재배면적은 전세계 벼 재배면적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한국의 벼농사는 이미 삼한시대(三韓時代)에 쌀을 식량으로 이용했을 정도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현재는 국민의 주된 식량으로서 다른 농작물에 비하여 재배면적과 생산량이 월등히 많고 가장 중요한 농업의 형태로 발전하였다. 김해는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신답평에 왕도를 정했다"는 문장으로 벼농사 기록이 남아 있다. 답평은 우리말로 '논실'인데, 이 지명은 지금도 대성동에 남아 있다. 봉황동 유적에서는 6세기경의 논이 발굴되었으며, 회현동 패총 발굴 때에는 불에 탄 쌀알이 출토되었다. 김해평야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곡창지대였으나, 개발과 도시 팽창으로 사라져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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