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옛 호계사터에서 허왕후릉 아래 파사각으로 옮겨진 파사석탑.

 
 후세대 가야불교 신봉 근원은 <삼국유사>
 허왕후, 파사석탑 등 가락국 이야기 담아

 삼국시대 전부터 한반도-인도 교류 진행
“밀접하고 발달한 사회·문화 관계” 추정

 인도서 가져온 탑 훼손 심해 고증 어려워
 아잔타석굴 스투파와 형태적 유사점 발견



과거의 시간과 공간이 대상인 역사에는 수많은 공백이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가야의 옛 모습에는 아직 공백이 많고, 제대로 복원되지 못했다. 대다수의 가야사 연구자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런 공백 가운데 실체를 둘러싼 찬반 의견이 가장 극명하게 갈리는 영역이 바로 가야불교다.
 
가야불교가 인도에서 바다를 통해 들어왔다는 주장을 인정한다면 불교가 중국에서 고구려로 전파됐다는 고대 문화사를 새로 써야 한다. 사안이 그 만큼 민감하기 때문에 아직까지 역사학계에서는 공론의 장에서 가야불교를 구체적으로 다룬 적이 없다.
 
하지만 이미 1000년 전부터 가야불교를 전통과 지역문화의 한 부분으로 믿는 지역민들이 적지 않다. 최근 지역사회와 불교학계에서는 가야불교의 근원을 찾기 위한 움직임도 활발하다. 그러한 믿음의 뿌리는 어디에 있을까.
 
조선시대 중기까지 가야불교 기록이 남아 있는 사료는 <삼국유사>가 거의 유일하다. 후세 사람들이 가야불교에 믿음을 가지게 된 가장 강력한 증거도 바로 <삼국유사>다. <삼국유사>에는 김수로왕의 부인 허황옥(허왕후)과 그 일행이 인도 아유타국에서 가락국(금관가야)으로 건너올 때 불교를 함께 들여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뿐만 아니라 은하사(옛 서림사)를 비롯해 만어사, 흥부암, 백운암 등 김수로왕대에 창건됐다고 전해지는 사찰들도 <삼국유사> 가락국기의 이야기를 연결고리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삼국유사>는 고려 후기 승려인 일연(1206∼1289)이 세상을 떠나기 전 10여 년 간 열정을 쏟아 완성한 고대사의 보물이다. 유학자 김부식(1075~1151)이 당대의 사료를 정리해 <삼국사기>를 완성한 것과 달리 일연 스님은 전국을 답사해 지역 곳곳에 전하는 설화와 기록을 채록했다. 이 때문에 <삼국유사>는 지식인을 비롯한 기득권의 입장 대신 당시 백성들의 '말'과 '생각'을 담은 역사서로 평가받고 있다. 비록 엄밀성과 정확성이 다소 떨어진다는 지적은 여전하지만 역사의 공백을 메우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삼국유사> '가락국기'는 '고려시대에 김수로왕과 허왕후를 기념하는 경주(競舟)놀이가 매년 7월에 열렸다'고 전한다. 백성 뿐 아니라 관리, 군졸이 모여 승점(乘岾·진해 용원 인근)에 장막을 설치하고 술과 음식을 즐기고 떠들면서 허왕후가 먼 바닷길 여정을 거친 뒤 가야의 주포에 닿아 김수로왕을 만나러 가는 초야행을 따라한 것이었다.
 
고려 전역을 돌아다니며 지역의 내력을 찾아가던 일연은 옛 가락국의 고도(古都)에서 허왕후 초야행 놀이를 목격한다. 그가 보고 들은 가야 후예들의 축제와 이야기는 허왕후 일행이 인도에서 왔고, 그들이 한반도에 불교를 이식했다는 확신이 되기에 충분했다.
 

▲ 김수로왕과 허황옥이 사흘 동안 묵었다는 산에 지은 명월사(현재 흥국사) 전경. 1942년 중건해 오늘에 이르렀다.

<삼국유사>에는 또 허왕후의 도래와 가야불교 관련 내용이 직접적으로 나온다. 대충 정리하면 이렇다. '허황옥이 김수로왕과 결혼하기 위해 인도에서 불탑인 파사석탑을 갖고 가야로 왔다. 김수로왕 때 이미 만어산에 절이 있었다.' 허황옥이 파사석탑을 갖고 온 것은 불교를 전파했다는 증거이며, 이 덕분에 이미 가야시대에 절이 설 정도로 불교가 흥했다는 것이다.
 
이제 <삼국유사>의 내용을 차근차근 하나씩 살펴보자. 먼저 허왕후가 인도에서 가야로 와서 김수로왕과 결혼했다는 부분은 이렇다.
 
'왕은 유천간(留天干)에게 망산도(望山島)에 가서 기다리도록 하고, 신귀간(神鬼干)에게 승점(乘岾)에 가도록 했다. 바다의 서남쪽 모퉁이부터 붉은색 돛을 달고 붉은색 깃발을 휘날리는 배가 와서 사람들이 땅으로 내려왔다. 왕은 궁궐 서남쪽 산기슭에 임시궁궐을 만들고 왕후를 기다렸다. 왕후는 별포(別浦)나루에 배를 대고 높은 산 위에서 쉬면서 입고 있던 비단 바지를 벗어 산신령에게 바쳤다. 종까지 헤아리면 20여 명이나 되었다. 왕은 왕후를 맞아 임시궁궐로 들어갔다. 왕후는 '저는 아유타국의 공주입니다. 성은 허이고 이름은 황옥이며, 나이는 16세입니다. 부왕께서 상제의 명령이라며 가락국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라고 했다.'(<삼국유사> 가락국기조)
 
허왕후 일행의 도래와 시기적으로 다소 차이를 보이지만 고대 한반도, 즉 삼국시대와 그 이전부터 인도와 한반도 사이에는 해양을 통한 포교와 유학이 행해졌다. 지금은 전하지 않는 <미륵불광사사적기>에 따르면 526년(성왕 4년) 백제 승려 겸익이 인도에 구법유학을 다녀오기도 했다. 554년(성왕 32년) 백제가 왜에 보낸 물품 가운데 양모를 주 성분으로 하는 페르시아 직물로서 북인도에서 산출되는 모직이 확인된다. 1999년 부여 능산리 절터 6차 발굴 때 면직물이 수습됐다. 중국에서는 송대 이후에야 면화가 인도에서 유입됐다. 능산리 절터의 면직물은 백제와 인도의 교류를 뜻하는 증거인 것이다.
 
S.R.바트 인도철학연구회 회장은 지난해 부산 동명대에서 열린 국제학술대회에서 "인도인 신부와 한국인 신랑이 결혼했다는 것은 인도-한국 간에 밀접하고 발달된 사회, 문화적 연관 관계가 있음을 암시한다. 몇 세기 동안 양국 국민들 사이에 사회 문화적 접촉이 있은 이후에 발생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가야불교는 고고학으로 입증하기가 쉽지 않다. 대개 목축 건물은 전쟁, 화재 등으로 쉽게 소실되기 때문에 석탑이나 옛 사찰 터의 주춧돌을 통해 과거 불교의 존재를 확인하는 게 일반적이다. 국내 불탑은 4세기 목탑 형식으로 전래됐고, 7세기 전후 백제에서 석탑이 출현했다는 입장이 통설이다. 김해에서 전형적인 양식을 갖춘 석탑은 한림면 신천리 망월석탑 등 고려시대부터 출현한다. 아직 형태를 유지한 사찰 터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주류 고고학계는 가야불교의 실체를 부인한다.
 
이런 척박한 환경에서 가야불교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유물이 바로 파사석탑이다. 현재 허왕후릉 아래 파사각에 옅은 붉은 빛과 보랏빛을 띠며 자리한 석탑이다. <삼국유사>는 파사석탑을 이렇게 소개한다.

▲ 지난해 '허왕후 신행길 축제'에서 허황옥이 배를 타고 가야로 오는 장면이 재연되고 있다.

'금관 호계사의 파사석탑은 옛날 이 고을이 금관국일 때, 수로왕의 비 허황옥이 동안 건무 24년(서기 46년) 갑신에 서역 아유타국에서 싣고 온 것이다. 처음에 공주가 양친의 명을 받들어 바다를 건너 장차 동(쪽)으로 향하려 하다가 파도신의 노함을 견디지 못하고 돌아와 부왕에게 고하매 부왕이 이 탑을 싣고 가게 하니 그제야 무사히 항해하여 금관국의 남쪽 해안에 도착하였는데, 비범과 천기와 주옥의 아름다움이 있었다. (중략) 탑은 모진 사면의 5층이고 조직이 매우 기묘하며, 돌은 조금 붉은 빛의 반문이 있고 질도 좋아 우리나라의 (종)유가 아니다.'(<삼국유사> 파사석탑조)
 
파사석탑은 원래 호계천 동쪽에 있던 것을 조선 말 김해부사 정현석이 지금의 자리로 옮겨 왔다. 파사석탑을 범어(梵語)로는 '바사석탑'이라고 한다. 파(婆)는 범어로 '유(有)'라는 뜻의 바(bha)다. 사(娑)는 '체(諦·진실한 도리)'라는 의미다.
 
역사적 기록은 있지만 이 탑이 실제 인도에서 왔는지, 언제 세워졌는지 등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은 상황이다. 역사학계나 고고학계에서도 정확한 규명을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고고학의 방법론은 탑의 기단수, 양식, 문양 등을 통해 건립시기를 추정한다. 그런데 파사석탑은 너무 많이 훼손돼 본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기 때문에 고증이 쉽지 않은 것이다.
 
재야사학자인 허명철 조은금강병원 이사장은 <가야불교의 고찰>에서 파사석탑의 형태가 제대로 보전되지 않은 이유를 "후대 사람들이 이 탑의 돌을 가지고 항해하거나 고기잡이를 하러 가면 파신의 노여움을 사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에 조금씩 훔쳐 가면서 망가뜨린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허 이시장을 비롯한 지역민들은 파사석탑의 재질이 국내 석탑의 재료로 주로 쓰이는 화강암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발견되지 않는 파사석이며, 먼 바다에서 건너왔다는 사실을 믿고 있다. 실제 중국의서인 <본초강목>에서도 파사석을 남방에서 전래된 것으로 보고 있다.
 
파사석탑이 한국 고대석탑의 전통양식과는 다소 차이를 보이지만, 인도의 불탑인 스투파의 상단부 또는 축소된 형태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1세기에 인도에서 왔다는 <삼국사기> 기록과 부합하는 측면도 배제할 순 없다. 인도 아잔타석굴 가운데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 후 100년 사이에 조성된 전기동굴의 일부 스투파에서 파사석탑과의 형태적인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허 이사장은 "파사석탑은 파사석으로 만든 축소형 스투파나 혹은 스투파 상단 입주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에서 '기이'하다고 표현한 것도 이런 형태의 탑은 고려 탑 뿐 아니라 신라 탑으로도 보기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반면 이영식 인제대 고고역사학과 교수는 "문헌과 고고학 자료에 따르는 한, 파사석탑을 허황옥의 도래에 직접 연결하기는 쉽지 않다. 남쪽 바닷길을 거쳐 가야에 전해지던 선진문물의 한 갈래로 해석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다음 주에 계속)
 
김해뉴스 /심재훈 기자 cyclo@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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