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모산에 위치한 장유사 대웅전의 전경. 인도 아유타국에서 온 장유화상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 장유화상 영정.

허왕후·파사석탑·장유화상 가야불교 상징
장유화상 기적비 “대천세계 불문의 조상”

<삼국유사> 드라비다어 가야어로 ‘물고기’
은하사 쌍어문, 수로왕릉 신어상 등 근거
토속신앙 결합된 소승불교 영향 가능성

김유신 일가 기반 강화와 설화 개연성 주장 
문헌·언어·민속 등 다각도 연구 접근 지적



허왕후(허황옥)의 도래, 파사석탑의 존재와 함께 가야불교를 신봉 하는 이들이 떠올리는 사람이 있다. 바로 허왕후와 함께 왔다는 오빠 장유화상(長游和尙)이다. 그는 가락국에 불교를 전파했을 뿐 아니라, 수로왕의 일곱 왕자를 성불(成佛)시킨 이로 전해진다.
 
장유화상의 활자 기록은 18세기에 등장한다. 1708년 부산 강서구의 흥국사에 있는 명월사 사적비에는 김수로왕과 허왕후의 만남이 기록돼 있다. 이 비에 장유화상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중수할 때 무너진 담장 아래에서 등에 '건강 원년 갑신년[144] 3월 감색' 등의 글자가 있는 기왓장을 주웠다. 여기서 장유화상이 서역에서 불법을 가지고 오자 왕이 불도를 중히 여기고 부처를 받들었음을 증명할 수 있다.(후략)"
 
장유, 장유산 등의 지명은 장유화상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은하사 대성 큰스님은 "장유(長有)의 '있을 유(有)'는 장유화상의 '놀 유(遊)'가 변형된 것이다. 장유(長游)를 불가에서는 '대도인'으로 해석할 수 있다. 길다는 것은 과거, 현재를 거치면서도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노닌다는 것은 경계에 사무치지 않고 자유롭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 장유사 경내에 자리한 장유화상사리탑(오른쪽)과 장유화상기적비. 경남도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장유사의 '장유화상 기적비'에는 이런 싯구가 전한다. '멀도다, 아유타여! 서로 부르기를 남천축(옛 인도)이라 하는구나. 화상이 공자로 있을 때부터 상교의 현묘한 이치를 응당 오래 익혔으리라. 돌배가 총령(파미르 고원)의 말보다 빠르니 혀오가 우우가 동토이 객이 되었다. 동생(허황옥)은 억만 생민의 시조요, 오빠(장유화상)는 대천세계 불문(佛門)의 조상이로다.'
 
허왕후 때에 불교가 전파된 덕분에 김수로왕 시대에 가야에 절이 있었다는 기록도 <삼국유사>에 나온다.
 
'만어산 근처에는 하늘에서 내려온 수로왕에 의해 다스려지던 가락국이 있었다. 만어사 경내 옥지의 독룡과 만어산의 다섯 나찰녀가 오가며 사귀었는데 때때로 천둥비를 내려 4년이 지나도록 곡식이 익지 않았다. 왕이 주술로서도 멈추지 못하자 부처님을 청해 설법했다. 이에 나찰녀들이 5계를 받아 후환이 없어졌다.(<삼국유사> 탑상, 어산불영조)'
 
가야불교를 믿는 이들은 지명 연구, 언어학적 접근, 민속사 등을 통해 그 실체를 규명하려고 한다. 문헌, 고고학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실증주의 역사방법론을 비판한 프랑스 역사학자 마르크 블로크가 <역사를 위한 변명>에서 '역사 연구는 의미심장한 사실에 도달하기 위해서 다양한 성질을 지닌 증거들을 하나로 모아야 한다. 역사만큼 서로 다른 수많은 도구를 동시에 사용해야만 하는 학문은 드물다'고 지적한 점은 이런 상황에서 의미가 깊다.
 
2011년 작고한 강길웅 교수는 1980년대 중반 '가야어와 드라비다어의 비교'란 제목의 논문에서 고대 한글과 남인도의 언어인 드라비다어의 유사성에 주목했다. 그는 '<삼국유사>에서는 가야, 가락이 물고기 '어(魚)'를 뜻한다고 했다. 이는 드라비다어와 대응관계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벼=비야(biya), 씨=비씨(bici), 풀=파티풀(pattipul) 등 대응관계에 있는 어휘가 400개에 이른다'고 설명한다.
 

▲ 은하사 대웅전 대들보의 신어(神魚) 단청. 머리는 용, 몸통은 물고기를 형상화했다.

장유화상이 불교 유입을 기념해 신어산에 지었다는 은하사 대웅전 수미단에는 허왕후와 관련 있는 것으로 전해지는 쌍어문이 있다. 또 은하사 대웅전 본존불이 관음보살이라는 점도 은하사와 인도와의 관계를 짐작하게 한다. 관음신상은 인도로부터 한반도에 직수입된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정설이기 때문이다.
 
물고기는 수로왕릉 정문에도 '쌍어' 형태로 존재한다. 옛 가락국 지역의 산 가운데 김해 신어산, 밀양 만어산, 양산 어곡산 등 물고기 '어' 자가 들어간 산이 많다는 것도 인도문화 교류의 증거이자 가야불교 도래의 근거다. 이러한 물고기 관련 흔적은 수로왕릉 정문의 '신어상'과 은하사 대웅전 단청의 '신어문'과도 맥이 닿아 있다.
 

▲ 흥국사(옛 명월사) 경내에 자리한 ‘가락국태왕영후유허비’.

이거룡 선문대 교수는 지난해 동명대 국제학술대회에서 "물고기 신앙은 초기 소승불교의 성격을 보여주는 측면이 있다. 1세기 당시 인도의 소승불교는 개인 수양을 중시했다. 아직 불교가 경전의 형태로 나아가지 않았을 뿐 아니라, 국가의 중앙집권화를 뒷받침할 이론으로서 대승불교로 분화되지 않은 소승불교는 토속신앙인 물고기 신앙의 결합이 용이했다. 실제 소승불교에서는 물고기, 뱀 등 다양한 토템이 주요한 요소이자 장치가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명은 쉽게 변하지 않는 보수적인 언어 정보다. 고대사회일수록 언어는 큰 상징성을 지니고 나라 이름이나 지명에 반영된다"면서 드라비다어와 가야 지명의 유사성에 의미를 부여했다.
 

이처럼 <삼국유사>가 곳곳에서 가야불교의 가능성을 지적하지만, 역사학계는 <삼국유사>의 의미를 인정하면서도 허왕후의 인도 도래와 불교 전래 가능성을 낮게 보고 있다.
 
조원영 합천박물관 관장은 "가야의 불교가 해양을 통해 전래됐다는 것을 완전히 부인할 수는 없다. 누구도 아니라고 장담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통일신라 후기 중앙정계에서 밀려난 김유신 집안(김해김씨)이 가계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지지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각종 전승설화와 기록에서 사실을 다소 과장해 허왕후의 도래와 불교 전래를 강조했을 개연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대성 큰스님은 "신라가 가야를 합병하면서 가락의 역사는 훼손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파괴돼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고고학, 문헌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 가야불교의 근원을 찾기 위해서는 언어, 민속 등 다양한 요소를 차용해 접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해뉴스 /심재훈 기자 cyclo@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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