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병섭 인제대 교수.

매년 2월에는 대부분의 학교에서 졸업식이 치러진다. 내 기억엔 초등학교는 아무 생각도 없이 졸업한 것 같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는 사춘기라 그런지, 괜시리 졸업식을 집에 알리지도 않고 혼자서 졸업장을 받아들고 집에 돌아 왔었다. 고등학교는 대학입시와 맞물려서 흥분된 상태에서 이젠 어른이 되어 간다는 느낌으로 학교를 마쳤다. 대학에서는 군대를 제대한 후 졸업하니 20대 후반이라 취업을 앞두고 졸업을 실감하지 못했었다. 그렇게 네 번의 졸업식에서 스스로는 그 의미를 곱씹지 못했지만, 대학 제자들이 매년 입학하고 졸업하는 모습을 보면서 의미있는 졸업식이 되기를 기대했었다.
 
규모에 따라 다르지만 대학은 수 천 명의 학생이 졸업하기 때문에 아기자기한 졸업식을 기대하긴 어렵다. 또 대부분의 졸업생들은 졸업식전에 취업하여 직장생활을 하고 있거나, 취업 준비에 바빠서 기념사진만 열심히 찍는 것 같다. 그러나 재학생들이 학과단위의 졸업식을 별도로 진행하여 선배들의 졸업을 축하하고, 의미있는 새 출발을 격려하는 학과들도 있다. 나는 그런 기회를 빌어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졸업은 지난 과정을 벗어나 새로운 과정에 들어가는 것이다'라고 한다.
 
지난 2월 초에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 월드 투어 공연이 김해문화의전당 마루홀에서 열렸다. 지인이 입장권을 구해줬는데, 다른 일이 겹쳐 공연을 직접 관람하지 못하고, 딸들의 감상평만 들을 수 있었다. 두 시간 반에 걸친 공연은 관람객이었던 두 딸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던 모양이다. 김해의 특성상 많지 않은 세계적인 공연을 관람할 기회를 놓치지 않은 관람객들과는 달리 형편이 어려워서 관람기회를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아쉬운 기회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은 꼬리를 물고 '얼마나 많은 제자들이 이런 기회를 잡을 수 있을까' 하는 우려가 생겼다. 졸업생들이 사회초년생으로 발 디딜 우리 사회의 모습은 만만한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만찮은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타인과의 무한경쟁에 내몰려왔고, 내몰리는 제자들의 모습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일반적인 모습이다.
 
나이 많은 어른들은 과거 고속성장의 경험 속에 살고 있는 분이 많다. '안 해서 안 되는 것이지, 하면 된다' 등의 표현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말에는 경쟁에서의 실패가 개인의 잘못에서 비롯된 것으로 판단케 한다. 자유경쟁사회의 일반적인 모습은 1% 미만의 사람들만이 경쟁에서 성공한 것으로 대접받는다. 우리 사회의 문제점은 '1등'만이 대접받고, 90%의 사람들이 무시되어 왔다는 것이다. 90%의 사람들도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대접을 받아야 한다. 성숙한 사회의 복지제도는 무한경쟁사회의 문제점을 보완한다. 경쟁에서 실패해도 인간의 기본적인 존엄을 지킬 수 있다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수업 중 학생들에게 '내가 너희만 할 때는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펴곤 했다'고 말하지만 예전과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예전에는 열심히 일하고자 하면 일자리가 있었고, 누구나 풍족하지는 못해도 먹고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창조를 위해서는 상상의 결과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어야 한다.
 
새 출발하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지난 과정의 성공과 실패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교훈으로 새겨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 성장주도형 경제정책 속에 자유와 평등이 무시되는 한국적 민주주의가 강요되었듯이, 현재 세계는 무한 경쟁 속에서 개인의 끊임없는 노력과 희생이 강요되고 있다.
 
상상은 백지의 상태에서 발휘되는 것이 아니다. 상상력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수많은 것들을 다른 사람이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조합하여 새로운 물질이나 공정, 지식이나 정보를 만들 수 있게 한다. 물론 개인이 알고 있는 수많은 것들이 교육과정에서만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교육제도 밖에서 더 많이 배우기도 한다. 이 때문에 행복은 학교 성적순이 아니라는 말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상상이 현실에 적용되는 과정에서 성공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할 것이다. 사회로 나아가는 제자들이 상상의 날개를 활짝 나래질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주고 싶은데, 아직 사회적 근심이 끝나지 않은 것 같다. 만해 한용운의 '꿈과 근심'이라는 짧은 시가 생각난다. 긴 근심과 짧은 꿈이 서로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한용운의 바람은 지금도 계속되는 것 같다. '밤 근심이 하 길기에/ 꿈도 길 줄 알았더니/ 님을 보러 가는 길에/ 반도 못 가서 깨었구나.// 새벽 꿈이 하 짧기에/ 근심도 짧을 줄 알았더니/ 근심은 근심으로/ 끝 간 데를 모르겠다// 만일 님에게도/ 꿈과 근심이 있거든/ 차라리/ 근심이 꿈 되고 꿈이 근심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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