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마을에 살기 시작한 지 어언 2년째 접어 든다. 처음 이 마을에 들어 섰을 때 놀란 것은 적막함이다. 부산과 불과 한 시간, 김해시내와 삼십 분도 채 안 걸리는 곳인데 첩첩산중에 들어선 느낌이었다. 나와 함께 마을에 들어선 젊은 연극배우들은 "선생님이 우리를 도인으로 만들 모양이다"라고 탄식을 했다.
 
그때 마을 이름이 좋아서 그 뜻을 물었더니, '오는 비도 산에 막혀 되돌아 가는 곳'이란 의미란다. 그렇게 일군의 연극인들이 도요마을에 짐을 풀었다. 폐교된 초등학교 분교에 스튜디오와 도서관을 만들고, 배우들을 위한 숙소를 마련했다. 같이 입주한 최영철 시인은 도서출판 도요 간판을 내걸고 열 두권의 신간 도서를 발간했고, 매달 '맛있는 책읽기' 독서모임을 열었다. 아직 마을에 극장이 들어서지 않아서 스튜디오 연습장 공간에서 시낭송도 하고, 두서너 편의 연극도 막 올렸다.
 
이런 한적한 곳에서 독서모임을 하고 연극을 공연한다고 하니 모두들 의아해 했다. 과연 관객이 오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매달 관객은 왔다. '4대강 사업' 때문에 흙더미를 날리는 대형트럭들이 위험하게 산길을 내달려도 관객은 그 흙더미를 뚫고 찾아 왔다. 홍수가 나서 강에 정박 중이던 준설선이 떠 내려가던 날도 시낭송을 들으러 관객의 발길은 이어졌다. 그렇다면 언젠가 저 강변에 자전거 도로가 놓여지고 푸른 잔디로 단장되는 날 축제를 열리라. 강과 산에 둘러싸인 도요마을에서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강변축제를 열리라. 강변에 멋진 야외 수변무대를 만들어 강과 강 건너 경부선 철길과 산을 배경으로 연극을 막 올리리라. 그러면 강 건너 기차 속의 승객들까지 도요 강변의 축제를 볼 수 있으리라.
 
그날이 올 때까지 우리는 여기서 흙더미 날리는 덤프트럭을 피해 다니고, 트럭들이 망가뜨려 울퉁불퉁 패여버린 위험한 고갯길을 넘어 다닐 것이다. 홍수가 길을 막고 눈길에 미끄러지더라도 찾아 오는 관객이 있으므로 우리는 이 마을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이 각박하고 변덕이 심한 세상에 예술가들이 세우는 이상적인 공동체 마을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경이로운 일 아닌가.
 
나는 요즈음 '도요'란 이름 자체에 다시 의미 부여를 시작하고 있다. 도요새가 있다는 소리도 들은 적이 없고, 근처에 도자기를 굽는 가마가 있었다는 흔적도 없다. 그런데 왜 이름이 도요인가? 지명 이름을 자세히 들여다 보니, 한자로 '都要'다. 그렇다면 이곳은? 요새가 있는 도읍이다. 이 한적한 곳에 요새가 있었고, 상당수의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면? 맙소사! 나의 상상은 졸지에 고대 가야시대로 단숨에 거슬러 올라간다. 이곳은 고대 가야의 수군들이 진을 치고 있었던 요새가 아니었을까? 도요리를 지나는 낙동강 강폭은 유난히 좁다. 낙동강을 지나는 배들을 통제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곳이 바로 이곳 도요 강폭이었을 것이다. 맞은편 물금 쪽은 신라지역이었고, 강 건너 이쪽은 가야지역. 그렇다면, 이곳은 가야 국경 수비대가 진을 쳤던 곳 아닌가. 그렇다면, 김수로와 패권을 겨루다 신라지역으로 도주한 석탈해는 바로 이곳을 통해 신라로 건너가지 않았을까. 석탈해가 신라 왕이 되어 몇 차례나 가야를 침공해 들어 왔다면, 그 격전지 또한 이 일대가 아니었을까. 나의 상상은 급기야 이천 년 전 가야와 신라가 격돌했던 역사적 현장으로 날아간다. 이 적막한 고요 속에 묻혀 버린 도요마을에서 이천 년 전 고대 가야의 부활을 꿈꾸어 보는 것이다. 생림중학교로 가는 길을 지날 때마다 좌측에 우뚝 솟아 있는 검은 산을 바라보며 "아마 김수로 형제가 최초로 철을 발견했던 곳이 저 산 아니었을까?" 상상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내가 살고 있는 생림면 도요리는 산업화에 밀려나 버린 한촌이 아니다. 이천 년의 역사적 흔적을 끌어 안고 묵묵히 버티고 선 저 산과 변함없이 흐르고 있는 강이 나의 상상력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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