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성각에서 내려다 본 영구암 전경. 그 아래로는 김해 시내가 한눈에 보인다.


전설로 내려오는 9암자 중 네 곳 남아
장유화상 제자 수행 위해 세운 절 곳곳
거북 머리·등껍질·목·꼬리·양발 모양

1910년 완호 낙현스님 작품 칠성탱화
도교 칠성신앙 상징 북두칠성·북극성 담아
삼성각 보관 덕 대웅전 불 피해 모면

밭 개간하다 우연히 찾은 삼층석탑
노반·복발 하나로 조각돼 인도와 흡사



삼방동 신어산은 정상이 631.1m로 높지 않지만, 금관가야 시조인 김수로왕과 허왕후(허황옥)의 신화가 어려 있는 '성산(聖山)'으로 불린다. 신어산에는 허왕후의 오빠인 장유화상이 창건했다고 알려진 절이 많다. 전설에는 아홉 암자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중 은하사, 동림사, 영구암, 천진암 등 4곳만 지금까지 남아 있다.
 
신어산의 등허리, 기암절벽에 있는 영구암은 장유화상의 첫 수행지다. 이곳에 가려면 은하사, 동림사를 지나 삼림욕장 끝에 주차를 하고도 등산로를 따라 20여 분 더 올라가야 한다. 경사가 가파르기 때문에 가는 길은 쉽지 않다. '이런 산에 어떻게 절이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몸에 땀이 배일 즈음 비로소 영구암이 나타난다. 산 중턱에 숨은 보석 같은 이곳에 경남문화재자료 제473호인 영구암 삼층석탑과 제504호인 영구암 칠성탱이 보관돼 있다.
 
소중한 문화재가 2건이나 있지만, 영구암은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절이다. 영구암은 장유화상이 수행을 하던 곳으로 알려졌다. 장유화상과 그를 따르던 제자들이 이곳에서 수행을 하는 바람에 절이 생겼다고 한다. 창건 시기는 정확하지 않다.
 

▲ 장유화상이 물을 마셨다고 하는 우물터.

영구암 대웅전 아래 전각 옆에는 가로, 세로 폭이 50㎝밖에 안 되는 작은 우물터가 있다. 장유화상이 이곳에서 물을 마시며 수행을 했다고 전해진다. 영구암은 '신령할 영(靈)', '거북이 귀(龜)' 자를 쓴다. '귀(龜)'는 '구'로도 읽히기 때문에 영구암이라 읽지만, 사실은 '영귀암'이다. 이곳을 영귀암이라고 하는 것은 신령한 거북이의 형상을 하고 있어서다. 위에서 바라보면 삼층석탑 주변은 거북 머리, 대웅전 앞은 거북 목, 삼성각 뒷봉우리는 거북 등껍질, 신어산 정상은 거북 꼬리, 영구암 좌우의 암벽은 거북 양발의 모습을 하고 있다.
 
영구암 대웅전에는 1960년대에 불이 났다. 그때 절에 있던 탱화, 기록물 들이 다수 불에 탔다. 영구암의 주지인 선공스님은 "불이 나지 않았다면 보물로 지정됐을 문화재가 많았다"고 아쉬워했다.
 

▲ 영구암 대웅전 전경.

칠성탱화는 운좋게 화재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탱화가 대웅전이 아니라 대웅전 뒤편에 있는 삼성각에 보관돼 있었기 때문이다. 칠성탱화는 북두칠성과 북극성을 상징하는 성군과 부처를 그린 그림이다. 신기한 점은 불화에 그려진 인물이 부처가 아니라 절반 정도는 관복을 입은 성군이라는 사실이다.
 
칠성탱화에는 총 18명이 등장한다. 가장 가운데 있는 이는 북극성을 상징하는 자미대제(紫微大帝)다. 도교에서는 별이 인간의 길흉화복과 수명을 지배한다고 믿는다. 이중 북극성은 칠성을 관장하는 역할을 한다. 자미대제 양옆에 있는 성군 7명이 바로 북두칠성, 즉 칠성이다.
 
칠성탱화는 도교의 칠성신앙이 불교에 흡수됐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자미대제와 성군 위에 있는 부처 역시 같은 의미다. 도교에서는 북극성이 자미대제가 되고, 불교에서는 치성광여래(熾盛光如來·칠성불)가 되는 것이다. 북극성과 칠성 외에 치성광여래 양 옆에 있는 부처는 치성광여래를 보좌하는 보살이다.
 

▲ 칠성각에 있는 칠성탱화. 1910년대 낙현스님이 그렸다.

칠성탱화는 완호 낙현스님(1869~1933)이 1910년에 그린 작품이다. 작품 아래쪽에는 작가의 이름과 제작 시기, 후원자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그림의 보존처리 과정에서 나온 복장물에도 이같은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담백한 색채를 사용하면서도 명암을 달리해 그림에 깊이를 부여한 게 특징이다.
 
영구암 관계자에 따르면, 처음에는 칠성탱화가 그렇게 귀중한 자료인지 몰랐다고 한다. 선공 스님은 "원래는 탱화의 상당 부분이 금박으로 돼 있었다. 지금도 자세히 보면 탱화 곳곳에 금박이 남아 있다. 탱화가 있던 삼성각이 습한데다 작품이 100여 년 전의 것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훼손됐다. 추가 훼손을 막기 위해 4~5년 전 영구암 입구 칠성각으로 그림을 옮겼다"고 설명했다.
 
거북 머리에 해당하는 삼층석탑에 서면 김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부산 녹산도 보이고, 날이 아주 맑으면 대마도까지 보인다고 한다. 삼층석탑은 일부분만 남아 있다. 석탑 아래층의 하대갑석과 상대갑석, 석탑의 층수를 결정하는 지붕돌인 옥개석 3개, 꼭대기에 있는 노반과 복발 부분이다. 남아 있는 옥개석은 여기저기가 부서져 훼손이 심한 상태다. 남아 있는 부분으로 볼 때 고려시대 탑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삼층석탑을 보면 다른 석탑과 달리 허전한 느낌이 든다. 지붕돌인 옥개석 사이에서 중간 기둥 역할을 하는 탑신이 없기 때문이다. 중간 기둥 없이 3층 옥개석만 그대로 쌓여 있다. 이전에는 영구암에서 삼층석탑 형태를 보이기 위해 중간에 탑신을 대신할 벽돌을 쌓아뒀지만, 인위적인 느낌이 든다고 해서 이를 빼버렸다.
 

▲ 1970년대에 복원한 영구암 삼층석탑(왼쪽 사진). 삼층석탑 상층부. 인도 간다라지역의 탑과 유사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1970년 이전에는 현재 자리에 석탑이 없었다. 당시 절 아래의 밭을 개간하면서 석탑 조각들을 찾아내 지금의 형상으로 맞춰 놓은 것이다. 선공스님은 "석탑이 묻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못했다. 밭을 개간하면서 큰 돌을 발견했다. 그게 석탑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당시에는 굉장히 놀라운 사건이었다. 절에서 전문가의 자문을 받아 석탑을 복원해 지금 모습을 갖추게 됐다. 조선시대에 억불정책을 시행할 때 유생들이 석탑을 부숴 밭에 묻어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석탑은 많이 훼손돼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쉽게 볼 수 없는 귀한 석탑이기도 하다. 다른 석탑에는 가장 윗부분인 노반과 복발이 분리돼 있지만, 영구암 삼층석탑은 둥근 하나의 돌로 조각돼 있다. 이는 인도 간다라 지역 탑의 모습과 유사하다. 우리나라 석탑의 기원이 인도의 불탑에 있음을 입증하는 자료이기도 하다. 옥개석 아래에 있는 돌에는 둥근 반원 같은 구멍이 패여 있다. 사리를 보관한 공간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선공스님은 "훼손되고 분리돼 있는 석탑을 거둬 조각을 맞추긴 했지만 없어진 부분이 많아 원래 모습을 완벽히 복원하지 못하고 있다. 귀한 문화재가 시민들에게도 많이 알려질 수 있도록 하루 빨리 복원되길 바란다"는 소망을 내비췄다.
 
김해뉴스 /조나리 기자 nari@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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