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곡회관 옥상에서 내려다 본 마을 전경. 초록빛의 산과 주택, 공장들이 한 눈에 들어온다.


임진왜란 때 피란 왔던 조갑환 정착
농업·축산업 종사 주민 80여 명 거주

초록 물든 장엄산 병풍처럼 감싼 지형
재실 ‘치사재’서 음력 10월 보름 때 묘사

안곡리 삼층석탑, 고려시대 절 추정
콜레라 막은 나무 앞서 정월대보름 당산제
수 년 사이 공장 몰려와 마을 모습 악화



"꼬끼오~!"
 
한림면 안곡리 안곡마을에 들어서자 어디선가 닭 울음소리가 들렸다. 오전 10시가 넘은 시간인데 어쩐 일일까 싶었다. 닭은 연거푸 두 번을 더 울고서야 성이 풀린 듯 울음을 뚝 그쳤다. 일순간 주위가 조용해졌다. 주변을 둘러보니 드문드문 낡은 빈 집들이 눈에 띄었다.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의 안내에 따라 오르막길을 향해 올랐다.
 
열 발짝이나 떼었을까. 동네에서 손꼽힐 만큼 현대적인 건물이 눈앞에 우뚝 섰다. 마을회관이다. 1999년 100평 부지에 2층으로 만든 안곡회관이다. 1970년에 지었던 낡은 건물을 허물고 다시 건립했다고 한다. 마중을 나온 조수현(67) 이장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그는 "주민들의 평균나이가 75세쯤 되니 마을회관이라기보다는 경로당인 셈이다. 오늘은 어르신들을 위해 회관 앞에 운동기구를 설치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60대 중반이 '어르신'이라는 단어를 쓰는 게 어색했지만, 사실 그는 마을 토박이 주민 중에서 가장 '젊다'. 귀농한 3가구가 있지만, 자식들이 모두 성인이라고 하니 청년은 아닌 듯했다.
 

▲ 함안조씨 문중이 매년 음력 10월에 묘사를 지내는 치사재 전경.

안곡마을은 '골짜기 안쪽'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상리·중리·안덕 마을과 함께 안곡리에 속하며, 한림면의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안곡마을은 함안조씨 집성촌이다. 조선 초기 단종을 위해 절의를 지킨 생육신 중 조려(1420~1489)라는 인물이 있었다. 조려의 6대손인 조갑환이 임진왜란 때 이곳으로 피난을 와 정착하면서 집성촌이 됐다. 지금은 함안조씨를 중심으로 35가구 80여 명이 살고 있다. 주민들은 대부분 농업과 축산업에 종사한다. 조 이장은 "다 집안사람들이어서 동네 혼사가 없었다. 맞선을 통해 외지에서 배우자를 데리고 와서 결혼했다"며 웃었다.
 
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비교적 높은 지대에는 함안조씨의 정신적 문화유산인 재실, '치사재(致思齎)'가 자리 잡고 있다. 조 이장은 "원래는 목조와가(기와집)였다. 1901년에 지어진 건물이어서 서까래가 내려앉고 낡아 지난해 허물어 시멘트건물로 새로 지었다. 해마다 음력 10월 보름이면 이곳에서 10대 이상의 조상에게 묘사를 지낸다"고 말했다. 탁 트인 느낌이 좋아 고개를 들고 주변을 한 바퀴 크게 둘러봤다. 초록빛으로 물든 장엄산이 안곡마을을 병풍처럼 감싸고 있다. 마을 곳곳에서는 알록달록한 봄빛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 고려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지방유형문화재 안곡리 삼층석탑.
▲ 아직도 남아 있는 우물. 지금은 모터를 달아 사용하고 있다.

치사재에서 마을 저수지를 지나 10분 정도 산길을 오르자 지방유형문화재인 '안곡리 삼층석탑'이 나왔다. 조 이장은 "어릴 때부터 삼층석탑을 봐 왔다. 그때 절은 없었다. 어른들에게서 옛날에 여기 절이 있었다는 이야기만 전해 들었다"고 회상했다. 안내판에는 석탑이 자세하게 설명돼 있다. 탑 부근에서 고려시대의 기와 조각이 발견됐기 때문에 고려 또는 그 이전의 시기에 절이나 탑이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탑의 전체적인 구조는 고려시대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는 설명도 있다.
 
마을 쪽으로 내려오다 보면 뚜껑이 덮힌 우물을 볼 수 있다. 원래 우물은 세 곳에 있었다고 한다. 마을회관 앞에 있던 우물은 폐쇄됐고, 나머지 두 곳은 아직 남아 있다. 이곳 우물에는 주민들이 모터를 달아 물을 끌어올려 사용하고 있다. 손을 씻을 때 쓰거나 인근 축사에서 이용한다.
 
축사로 통하는 조그만 다리 앞에는 '길 없음'이라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이장은 "길이 없는데도 사람들이 차를 몰고 축사로 들어갔다가 당황해서 차를 돌려 나온다. 그래서 축사 주인이 저렇게 썼다"라고 말했다. 길이 이어질 것 같은 모습과 길이 없다는 팻말이 겹쳐졌다.
 

▲ 오랜 세월 안곡마을을 지켜온 마을입구의 당산나무.

내려오는 길을 따라 마을 입구에 가면 마을을 지키는 당산나무가 서 있다. 먼 옛날 콜레라가 전국을 휩쓸 때 이 마을에만 병이 돌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주민들은 당산나무가 마을 입구를 지켜줬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주민들은 지금도 해마다 정월대보름날이면 촛불을 켜고 당산나무 앞에서 당산제를 지낸다. 조 이장은 "어릴 때보다 당산나무가 작아진 것 같다. 차들이 수시로 들이받는 바람에 가지가 꺾여서 그런 게 아닌가 싶다"며 안타까워했다. 실제 나무 한쪽에 큰 가지가 꺾여나가 속살이 드러난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세월의 무게를 버티느라 애쓰는 나무의 고통이 보이는 듯했다.
 
안곡마을은 개발의 바람에 시달리고 있다. 마을 곳곳에는 파란색, 회색 지붕의 공장들이 산재해 있다. 논밭이 펼쳐진 풍경과 축사에서 나는 가축 분뇨 냄새, 공장에서 들려오는 기계소리가 공존한다. 조 이장은 "예전에는 전부 논밭이었다. 7~8년 전부터 공장이 많이 들어섰다"고 설명했다.
 
앞으로 안곡마을에는 더 많은 공장이 들어올지도 모른다. 자꾸 변해갈 자연마을의 모습을 생각하면 씁쓸한 마음이 든다. 폐허가 된 빈집들이 보인다. 주민들이 개발을 피해 나갔기 때문일까, 빈집이 많아서 개발이 된 것일까. 현재 이 모습을 꼼꼼히 기록해 두지 않는다면 앞으로 머지 않은 장래에 안곡마을의 기억은 완전히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다. '자연마을' 시리즈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생각하면서 마을을 나섰다.
 
김해뉴스 /이경민 기자 min@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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