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평한옥마을 언덕에서 내려다 본 마을 전경. 지은 지 100년이 넘은 한옥들이 옹기종기 모여 마치 과거여행을 하는 느낌을 준다.


‘무오사화’ 정여창 후손 하동정씨 집성촌
건축 100년 넘은 한옥 60여 채 옹기종기
자부심으로 개발 배제해 보존 상태 탁월

외거노비 살던 가랍집 터 홍보관 변신
‘충효 가문’ 증명하는 1만㎡ 일두고택
500년 이상 내려온 ‘솔송주’ 향긋한 맛



'좌안동, 우함양'이라는 말이 있다. 흔히 영남의 학맥을 이야기할 때 쓰는 말이다. 이는 조선시대 때 함양군수를 지낸 김종직과 그의 제자 정여창 등에서 비롯됐다. 특히 성리학의 대가인 정여창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5명의 학자, '조선 5현'에 속한다. 그의 후손들은 지금까지도 정여창의 생가 터에 남아 하동정씨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사람들은 그곳을 '개평한옥마을'이라고 부른다.
 
김해를 출발해 진주, 산청을 거쳐 함양으로 향한다. 쉬지 않고 꼬박 두 시간 반을 달리면 '선비의 고장' 함양에 도착한다. 개평한옥마을에는 최소한의 표지판만 있을 뿐 관광지 특유의 꾸밈이 전혀 없다. 덕분에 실제 조선시대 어디쯤인가에 와 있는 듯한 묘한 기분이 든다. 이곳에는 지은 지 100년이 넘은 한옥 60여 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전주한옥마을이 꽃단장한 여성의 모습이라면, 개평한옥마을은 수수한 여인의 민낯처럼 느껴진다.
 

▲ 일두홍보관에서 일두고택으로 향하는 길. 분홍빛 겹벚꽃이 아름답다.

마을 입구에 서면 가장 먼저 '일두홍보관'이 눈에 들어온다. 일두는 정여창의 호다. 2009년 4월 문을 연 홍보관에는 정여창의 생애와 업적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전시돼 있다. 이곳에 상주하는 이미연(46) 문화관광해설사는 "1504년 정여창이 세상을 떠난 뒤 1570년 후손들이 정여창의 생가지에 '일두고택'을 지었다. 1690년대에 중수해 지금의 모양을 갖추게 됐다. 사랑채는 1843년에 따로 지은 건물이다. 덕분에 조선 중기와 후기 건물의 특징을 모두 엿볼 수 있다. 최근까지만 해도 후손들이 이곳에서 살았다"고 설명했다. 지금 일두고택은 한옥체험숙박시설로 사용되고 있다. 종손이 고택 인근에 살며 집을 관리한다.
 
지금 홍보관이 있는 자리는 과거 외거노비들이 살던 가랍집 터였다. 앞은 일반한옥, 옆은 일두고택에 둘러 싸여 있다. 노비, 평민, 양반 등 신분 차이를 느낄 수 있게 하는 세 개의 돌담이 홍보관 앞에 놓여 있다.
 
홍보관 왼쪽으로 난 돌담길은 '일두고택'과 연결된다. 바닥에는 얇은 돌이 깔려 있다. 대궐, 왕릉 등에서나 볼 수 있다는 귀한 박석이다. 말이 지나가면 말굽소리가 크게 나기 때문에 하인들에게는 양반이 돌아오는 것을 알게 하는 초인종 역할을 했다고 한다. 돌담 옆 만개한 겹벚꽃이 한옥과 어우러져 고상한 풍경을 연출한다.
 

▲ 일두고택의 곡간. 한 가문의 경제력을 보려면 곡간을 봐야 한다.
▲ 과거 정여창 선생의 생가터에는 현재 안채가 들어서 있다.

1만m²규모의 일두고택은 사랑채, 안채, 아래채, 곳간 등 12동의 건물로 구성돼 있다. 대문은 좌우 행랑보다 위로 높게 솟아있다. 가마를 타고 출입을 하기위해 주로 사대부집에서 설치했다는 솟을대문이다. 대문 안 홍살문에는 정려편액이 5개 걸려 있다. 정려패는 나라에서 마을의 효자나 충신에게 내리는 패다. 대개 한 집에 하나 걸리기도 어렵다. 정려패는 정여창의 조부와 후손들이 받은 것이다. 정여창의 집안이 대단한 충효의 가문이었음을 증명한다.
 
대문을 들어서면 보이는 'ㄱ'자 모양의 사랑채가 근사하다. 누마루 아래에 있는 광에는 잠금장치가 채워져 있다. 후손들은 양기가 부족한 사랑채를 다스리기 위해 광에 남근석을 숨겨 놓았다고 한다. 사랑채에서 안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안채가 나온다. 여기가 본래 정여창의 생가가 있던 자리다.
 
정여창은 1450년 이곳에서 태어났다. 34세에 진사에 합격해 성균관에 들어갔다. 42세에 시강원에서 세자 연산군을 지도했다. 이후 1498년 무오사화에 연루돼 '장형 100대, 유배 9년'이라는 형벌을 받았고, 함경도 종성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했다. 제자들은 두 달에 걸쳐 정여창의 시신을 모시고 와 고향 함양에 묻었다. 무오사화는 연산군 때 함양군수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 때문에 일어났다. 조의제문은 연산군의 중조부인 세조의 왕위찬탈을 풍자한 글이다. 정여창은 김종직의 제자라는 이유로 사건에 엮이게 됐다.
 

▲ 사랑채 누마루 아래 광. 남근석이 숨겨져 있다.

안채 앞마당에는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우물 하나가 깨끗하게 잘 보존돼 있다. 뚜껑을 열어 그 깊이를 가늠하고 있으려니 이미연 문화관광해설사가 우물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준다. "풍수지리학적으로 마을은 배가 앞으로 나아가는 모양인 '행주형(行舟形)'을 하고 있습니다. 마을 안에 우물을 만들면 배에 구멍이 생기는 꼴이라 사람들은 샘을 파지 않고 마을 밖 공동우물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100여 년 전 일제강점기 때 마을 앞에 지곡초가 문을 열었고 일본인 초대교장이 부임해 왔습니다. 그가 하동정씨 가문에 내려오던 학자의 정기를 끊어내고자 이 우물을 팠다고 합니다." 실제로 그 날 이후 하동정씨 가문의 가세가 기울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일두고택은 '정여창 고택', '정병옥 가옥'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1984년 1월 10일 고택이 중요민속자료 제186호로 지정될 때 정여창의 후손 정병옥 씨가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개평한옥마을에는 경남도유형문화재 제407호 '오담고택'과 제343호 풍천노씨 대종가, 제360호 '노참판댁 고가', 제361호 '하동정씨 고가' 등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한옥이 많다. 마을은 하동정씨 뿐만 아니라 풍천노씨의 집성촌이기도 하다. 정여창의 사촌이 결혼하면서 풍천노씨를 데릴사위로 들였기 때문이다.
 
문화재를 제외한 한옥에는 마을 사람들이 살고 있다. 이 중에는 마을에 남아 가업을 이어가는 정여창의 후손들도 포함된다. 정여창의 16대 손부인 박흥선 씨는 일두고택 마주에서 '솔송주 문화관'을 운영한다. '솔송주'는 하동정씨 가문에 500년 이상 이어져 내려오는 가양주다. 품질이 좋은 햅쌀과 솔잎, 송순을 재료로 빚은 술이다. 특히 발효주 '솔송주'와 증류주 '담솔' 등이 유명하다. 박 대표는 2005년 대한민국 식품명인 제27호, 2012년 무형문화재 제35호로 지정됐다. 16대 손인 정도상 씨는 마을 전체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서 한옥호텔과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무상하다는 세월은 개평한옥마을만 비켜가는 듯하다. 마을을 돌아보는 내내 '어찌 이토록 잘 보존되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해설사의 "전통을 지키려는 자부심이 개발을 배제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정답이 아닐까 싶다. 선조들의 삶을 꾸밈없이 고스란히 느껴보고 싶다면 이곳만큼 완벽한 곳이 없겠다. 가끔 지칠 때면 개평한옥마을에 들러 고즈넉한 분위기를 벗 삼아 사색에 잠겨보는 것도 좋겠다.
 
김해뉴스 /함양=이경민 기자 min@gimhaenews.co.kr


▶개평한옥마을 /경남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 339.
① 가는 방법 = 경전철 부원역 승차 후 부산 사상역 하차, 부산서부버스터미널~함양시외버스터미널. 함양시외버스터미널에서 안의·지곡면 방향 마을버스 탑승 후 개평마을 하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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