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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사찰’ 유래 40여 글자 새긴 암막새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인지(13) 부은사 (父恩寺)
  • 수정 2017.07.06 10:57
  • 게재 2017.07.05 09:54
  • 호수 330
  • 13면
  • 심재훈 기자(cyclo@gimhaenews.co.kr)


 

   
▲ 부은사 본전으로 사용되는 천불보전의 모습. 현재 전각들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터에 새로 지어졌다.



 

거등왕, 부친 은혜 위해 설립했다는 전설
신어산·무척산에도 있는 ‘통천’ 글귀 주목

향토사학자 빌려간 옛 기와는 사진만 남아
전각 건설 내력, 창건 관련 내용 기록 추정

인도서 전래됐다는 맷돌모양 ‘요니’ 눈길
힌두교에서 시바신 상징하는 신앙의 대상
국내에서 안 나는 파사석 주장 나와 관심




 

인도로부터 불교가 직접 전래됐다는 가야불교의 흔적은 김해에만 남아있는 게 아니다. 하동 칠불사, 밀양 부은사·만어사, 남해 보리암 등도 2000년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다. 최근 새 정부가 강조하는 가야사 복원사업이 김해와 경남을 넘어 전남 서부권역까지 포괄하듯 가야불교도 김해지역에만 머물지 않는다.
 

   
▲ 지원 스님이 '사라진 암막새'를 설명하고 있다.

한때 부은암으로도 불렸던 부은사는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오늘에 이른 사찰이다. 그런 만큼 가야불교에 얽힌 내력도 다양하다.  
 
부은사는 경남 밀양 삼랑진읍 안태리의 천태산 중턱 낙동강을 굽어보는 명당에 자리하고 있다. 가야국 2대 거등왕이 아버지인 수로왕의 은혜를 기리기 위해 세웠다고 전해지는 사찰이다. 이런 유래 때문에 부은사 사원등록증에도 창건 시기가 서기 200년으로 기록돼 있다.
 
부은사가 있는 안태리는 양수발전소 앞 '태봉(台峰)'에 김수로왕의 안태를 묻었다고 해서 마을 이름을 안태리로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현재 부은사 인근은 과거에는 민가 한 채 없던 곳이다. 1990년대만 해도 포장도로도 없던 오지였다. 
 
조선 전기까지 번영했던 사찰이었던 부은사는 임진왜란 때 명맥이 끊겼다. 당시 왜군들이 삼랑진을 공략했지만 의병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히자 천태산을 우회해 가다 부은사를 발견하고 불태웠다고 한다. 이후 조선 말인 1860년 대구 동화사에서 온 학송 스님이 옛 부은사지 위에 부은암을 복원했다. 이 암자도 얼마 가지 못하고 폐사됐다. 당시 학송 스님이 복원한 절은 오막살이 정도의 작은 암자였다고 한다.
 
이후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부은사는 기억의 흔적에서 사라질 처지가 됐다. 그러다 농산 스님이 한국전쟁 후 현재 사찰보다 100여m 아래 터에 부은사를 복원하기 시작했다. 농산스님은 지금의 부은사 본사를 중창한 태우 큰스님의 사조(스승의 스승)다.
 

   
▲ 부은사에서 내려다 본 낙동강.

농산스님이 폐허에 사찰을 중건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고 한다. 도로가 없어 석재는 지게에 지고 날라야 했다. 목재도 주변 산에서 수급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전쟁 직후여서 농산스님이 복원한 부은사는 금강송 등 좋은 목재를 쓰지 못했다. 이 탓에 현재 건물은 습기 등을 이기지 못하고 많이 상한 상태라고 한다. 
 
1990년대 들어 태우 큰스님이 현재 부은사 터에 새로 불사를 진행했다. 중건된 부은사는 산기슭을 따라 남서향으로 가람들을 배치했다. 가운데에 천불보전을 두고, 오른쪽에 범종과 목어가 있는 범종각을 세웠다. 천불보전 뒤로 영산전, 삼성각 등을 배치했다.
 

   
▲ 절 뒤편 암벽에 '통천도량' 글자가 새겨져 있다.

부은사 바로 뒤편에는 장마에 물이 흘러내리는 거대한 폭포 암벽이 있다. 이 암벽이 바로 가야불교와의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 폭포 암벽 하단부에 하늘과 통하는 장소라는 뜻의 '통천도량(通天度量)'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다. 글자를 눈에 잘 띄게 하기 위해 흰색으로 덧칠을 했다. 그래도 지금은 벗겨져 한눈에 글귀를 발견하기 어렵다. 글귀의 '통천'이 가야불교의 중요한 단서가 된다. 김해의 진산인 신어산과 무척산에서도 '통천'이란 단어를 볼 수 있다. 신어산의 은하사 종각 옆 바위에 '신어통천(神魚通天)'이 새겨져 있다. 무척산 천지연 인근 기도원 자리는 옛 '통천사(通天寺)'의 폐사지다.
 
이렇게 가야불교와 얽힌 사연이 많은 부은사는 과거 큰 절터였다고 전해진다. 부은사 주지 지원 스님에 따르면 옛 기와나 사기 조작이 발견된 지점이 10여 곳을 헤아린다. 그는 "이곳은 과거에도 오솔길만 있던 첩첩산중이었다. 부유층이 살던 기와집이 있었을 리 없다. 지속적으로 발견되는 과거 유물을 사찰 흔적으로 보는 게 타당하다"고 설명한다. 
 
부은사의 신도였던 주은택 거사가 발견한 '천불보전'은 이 절이 늦어도 조선시대부터 성행한 절이었음을 보여준다. 부은사의 주존불인 석조암타불은 복장(불상 내부에 봉안하는 사리와 여러 유물)의 발원문을 근거로 보면, 조선 숙종 시절인 1688년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경남 유형문화재 476호로 지정돼 있다.
 
부은사는 가야국 2대 거등왕이 부왕인 수로왕의 은혜를 기리기 위해 200년 무렵 세웠다는 게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다. 이보다 정확한 내력을 알려줄 유물이 발견됐지만 현재는 행방이 묘연해 안타까움을 주기도 한다.
 
1980년대 부은사의 유래를 설명하는 '○○왕 , 부암(父庵)' 등 40여 글자가 새겨진 암막새가 발견됐다. 암막새는 지붕 기왓골 끝에 사용됐던 기와다. 이후 한 향토사학자가 이를 빌려간 후 현재까지 행방을 찾을 수 없다고 한다. 남아 있는 것은 사진 뿐이다. 지원 스님은 "사라진 암막새는 전각을 지은 내력, 창건과 시주 관련 내용을 기록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사진이 남아 있어 국립김해박물관에 자문을 구한 결과 임진왜란 전후의 암막새로 보이며, 실물이 있으면 새겨진 글자를 판독할 수 있다는 답변을 들었다. 암막새를 다시 찾는다면 부은사의 정확한 유래를 규명할 수 있을 텐데 안타깝다"고 탄식했다.
 

   
▲ 인도에서 온 파사석으로 제작됐다고 전해지는 '요니'(왼쪽 사진), 원효대사, 사명대사 등이 수행했다고 하는 마고석굴.

수로왕 대에 부은사가 창건됐을 수도 있다는 의견도 있다. 밀양에서 가야불교 유래가 남아 있는 또 다른 사찰인 만어사에 얽힌 이야기도 전해져 내려오기 때문이다. 지원 스님은 "만어사 낙성식을 할 때 초대된 스님들이 부은사에서 하룻밤을 묵었다고 한다. <삼국유사>에는 만어사가 수로왕대인 서기 46년에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기 때문에 만어사 낙성식이 열리기 전에 부은사가 존재했다면 창건 시기를 현재 추정하는 서기 200년보다 앞당겨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부은사에는 인도에서 직접 전래됐다는 '요니'가 있어 가야불교와의 연결고리가 되고 있다. 사찰 입구에 현대식으로 지은 용왕당 옆에는 맷돌형상을 한 석물이 있다. 여자의 음부를 상징하는 요니라고 한다. 그 위에는 남성의 성기를 상징하는 '링가'가 올려져 있다. 요니는 인도 힌두교의 시바신을 상징하는 신앙의 대상이다. 처음엔 일반적인 맷돌로 여겼지만 1980년대 한 향토사학자가 부은사를 방문해 국내에서 나지 않는 파사석이라고 주장하면서 새로 조명을 받게 됐다. 허황옥(허왕후)이 인도에서 들여온 파사석탑과 동일한 석재라는 것이다. 이 맷돌모양의 요니가 정말 인도산 파사석인지는 아직 검증을 해 본 적은 없다.
 
부은사 뒤편 폭포 바위에서 500여m 산길을 가다보면 만날 수 있는 마고석굴도 이 절이 과거부터 수행자들이 머물다 간 사찰이었음을 말해준다. 옛적 '마고(麻姑)'라는 이름을 가진 신선이 머물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신라의 원효대사와 조선시대 사명대사가 마고석굴에서 수행했다는 유래가 전하는 유명한 기도처이기도 하다.
 
김해뉴스 /밀양=심재훈 기자 cyclo@gimhae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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