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경산수(眞景山水)는 조선시대 후기에 남종문인화의 영향을 벗어나 한국의 회화를 지향하여 일어난 새로운 화풍이다. 상상적인 산수도가 아니라 한국 땅의 풍치를 그려내는 산수화법을 의미한다. 어떤 특정한 실제 풍경을 그리는 것은 아니지만, 눈앞에 전개되는 무한대의 자연을 화가의 마음에 드는 대로 화폭에 그려내는 방법이다.
 
성선경 시인이 한국미술사의 중요한 화풍인 '진경산수'를 제목으로 한 시집을 발간했다. '서른 살의 박봉씨' '몽유도원을 사다' '모란으로 가는 길' 등의 시집에서 보여준 시적 세계관이 더 넓어지고 깊어졌다.
 
'오래 전 시인이 떠나 온 세계, 즉 고개 너머 농촌공동체의 삶과 풍경을 전통적인 서정시의 형식으로 담아내고 있다'는 고봉준 평론가의 말은 이 시집이 담고 있는 내용을 어느 정도 짐작하게 한다.
 
시집은 2부로 짜여졌다. 1부 '진경산수'는 시인의 유년세계를 이룬 시인 자신과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2부 '청학재 시편'은 시인의 고향마을의 풍경이 사설시조처럼 펼쳐진다. 한 대목 툭 잘라내어 드라마를 찍어도 재미있고, '한국의 풍경' 같은 다큐멘터리를 찍어도 흥미롭겠다.
 
시인의 대학시절을 소재로 한 '진경산수·16'에는 아들을 걱정하는 시인의 아버지가 있다.
 
"방언답사를 왔다 잠깐 들른 고향집 / 함께 들른 교수님께 대접이라야 별 게 있냐고 / 날계란 하나를 들려드리고 / 아버지 죄스럽게 묻는 말 // -선상님 그 학교 댕기면 선상 되나요? / -그럼요 되고 말고요. // 그래도 미심쩍어 냉수 한 잔 더 권하며 / 다시 묻는데 // -선상님 그 학교 졸업하면 정말 선상 되지요? // 아버지는 그 뒤로 세 번을 더 물었고 / 계란 하나 병아리 되듯 / 나는 가까스로 선생이 되었다."
 
아들의 장래를 걱정하고 확인하는 아버지의 심정을 볼 수 있었던 그 날의 기억이야말로 시인에게는 '젊은 날의 진경'이 아닐까. 시인은 경남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현재 교사로 재직 중이다.
 
'청학재 시편'의 '향교고개'에서는 그리운 시골 풍경이 기록되었다.
 
"왜지름병을 들고 넘던 길. 동생과 같이 먹겠다고 신문지에 싼 박하엿이 합천동이 되어 척척 달라붙던 길. 비린 간갈치 한 마리 없이 넘던 길. 자주 고무신이 찢어지던 청석길. 장동염감이 자주 누워서 넘던 길, 우리 집 황소 우진牛珍이가 팔려 간 길. 옥희 누나가 시집간 길. 영화 보러 밤 마실가던 길. 머슴 삼식이가 새경 떼먹고 달아난 길. 고개를 넘어가선 아무도 돌아오지 않던 길. 무엇보다도 이 고개만 넘으면 모두 출세할 것 같던 길. // 전보처럼 소식이 오던 길 /모든 세상과 통하던 길. /오직 한길"
 
이 고개의 해발고도가 얼마인지, 숨을 헐떡일 만큼 힘이 드는지, 멀리 동네는 훤히 내려다보이는지 한 마디 설명도 없지만 어쩐지 이 고개를 오래전 기자도 넘어본 것 같은 친밀감마저 든다. 얼마나 살뜰한 한 가족이었으면 이름마저 보물일까. 황소 우진이가 팔려 가던 고개를 바라보는 어린 시절 시인의 마음이 아프게 다가오기도 한다. 그야말로 우리 삶의 한 '진경'이다.
 
"겸재 정선의 그림에는 도의 세계를 지향하는 자연이 있었지요. 그 이후 단원의 그림에는 사람이 혜원의 그림에도 서민들의 풍습이 담겨집니다. 그 사람도 모두 자연의 일부입니다. 제 시집은 사람이 주인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 중에서도 나 자신이 중심에 있었습니다." 성선경 시인은 기자에게 시집을 건네면서 제목에 얽힌 이야기를 이렇게 풀어갔다. 시인이 사물을 받아들이는 시적 인식이 여기에 있었다. 시집 출판을 축하하는 조촐한 술자리에서 동료시인들이 "이 시집 제목을 선경산수로 바꾸자"고 농담을 던지는 까닭도 그 때문일 것이다.
 
최영철 시인은 "성선경은 지극한 사람이다. 산천을 보는 눈은 넓고 깊은 평화로 그윽하고, 사람을 보는 눈은 뜨거운 정으로 넘친다"고 시인을 소개한다. 자연과 사람을 보는 시인의 마음이 시편 구절구절 새겨졌다. 자연과 사람이 어우러져 사는 풍경, '진경산수'가 굽이굽이 펼쳐지는 시집이다.
▶성선경 지음/서정시학/109p/9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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