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촐한 만어사 전경. 고려시대에 세워진 보물 제466호 삼층석탑 뒤로 대웅전, 삼신각 등의 가람이 서 있다.


‘동해 용왕 아들이 불교 귀의해 만들었고
왕자 따라간 고기 떼는 수많은 돌로 변해’
조선시대 <동국여지승람> 등에 창건 설화

<삼국유사>엔 ‘만어사는 자성산, 아야사산’
수로왕, 부처에 청해 나찰녀 제압한 기록도

호암스님 “찬란한 가야 문화 반추할 기록
사실 다툼보다 공유, 전파 방안 모색부터”



만어사는 경남 밀양 삼랑진읍 용전리 만어산에 자리잡고 있다. 조계종 15교구 통도사의 말사다. 만어사는 가야불교 연기설화가 전해오는 여러 사찰 중에서 신도,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대표적 사찰이다. 밀양 8경의 하나로 알려진 '만어사 운해(雲海)'와 3대 신비로 불리는 '종소리 나는 만어사의 경석'이 있기 때문이다.
 
새벽녘과 봄비 내리는 날에는 만어사 주변에 피어오르는 운해가 천지를 뒤덮어 장관을 이룬다. 절 앞자락에 펼쳐진 바위들을 두드리면 종소리, 쇳소리, 옥소리가 난다는 '종소리 나는 경석'의 유래는 경상도 지역에서 많이 알려진 이야기다. 이 때문에 평일 낮에도 사찰을 찾는 이들이 적지 않다.
 
부산에서 만어사를 찾은 금다혜(60)씨는 "만어사에 세 번 왔다. 돌들이 물고기가 머리를 쳐들고 있는 형상이어서 볼 때마다 신기하다. 이곳을 찾는 방문객들 중에는 만어사의 유래를 아는 사람들이 많다"고 전했다.
 
이렇게 관광지로 유명한 사찰이지만, 만어사는 흔히 생각하는 대형 규모와 형식을 갖춘 고찰은 아니다. 대웅전과 미륵전, 삼성각, 범종각 그리고 요사채 등 가람을 모두 헤아려도 5~6동에 지나지 않은 작은 사찰이다. 수많은 바위로 이뤄진 만어산 암궤류를 정면에서 바라보는 미륵전도 최근의 불사로 지어졌다. 현재 만어사의 본전인 대웅전은 19세기 말 중창됐다고 전해진다.
 
대웅전 앞에는 보물 제466호로 지정된 만어사 삼층석탑이 있다. 사찰에 있는 유일한 보물인 삼층석탑은 만어사가 늦어도 고려시대부터 존재했다는 사실을 전한다. 삼층석탑 뒤편 넓은 터는 원래 법당 자리인 것으로 확인됐다. 현재의 대웅전은 원래 자리에서 위치를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
 

▲ 동해 용왕의 아들이 끌고 온 물고기떼가 돌로 변했다고 하는 만어산 암괴.

삼층석탑 기단부는 고려시대 석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단층 기단이다. 기단이나 몸돌은 비교적 완전하지만, 가장 위쪽의 상륜부는 없어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후대에 와서 별개의 석재를 다듬어 맨 꼭대기 구슬모양 장식인 '보주'를 대신하고 있다. 신라 시대 석탑보다 조형미는 다소 떨어지지만 전체적으로 균형과 안정적인 비례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만어사에는 수로왕 재임을 전후해서 동해 용왕의 아들이 수많은 고기떼를 이끌고 불교에 귀의해 만어사를 창건했다는 연기설화가 이어져 온다. 평소 보기 힘든 기이한 자연경관이 사람들로 하여금 이러한 이야기를 사실이라고 믿게 만드는 개연성을 가지고 있다.
 
조선시대 지리서인인 <동국여지승람>과 <택리지>에는 만어사 창건설화가 전한다. 옛날 동해 용왕의 아들이 목숨을 다한 것을 알고 낙동강 건너에 있는 무척산의 신통한 스님을 찾아가 새로 살 곳을 마련해 달라고 부탁했다. 스님은 가다가 멈추는 곳이 인연이라고 알려주었다. 왕자가 길을 떠나자 수많은 고기 떼가 그의 뒤를 따랐다. 왕자가 가다 머물러 쉰 곳이 바로 만어사라고 한다. 그 뒤 왕자는 큰 미륵돌로 바뀌었고, 수많은 고기들은 크고 작은 돌이 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러한 전설이 서려 있는 만어산 암괴류는 지질학적으로는 '한반도의 빙하기가 끝난 후 비가 많이 내리는 과정에서 물리적 풍화과정을 거치며 지금과 같은 모양을 갖게 됐다'고 한다. 섬록암, 반려암 암괴가 마치 양파 벗겨지듯 풍화되는 모습이어서 한반도의 지질 형성 과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한다. 규모도 매우 커서 만어산 정상부에서 700m 이상 펼쳐져 주변 경관과 매우 잘 어울린다.
 
고려시대 일연스님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채록한 기록과 이야기를 바탕으로 쓰여진 <삼국유사>에도 만어사 이야기가 등장한다. <삼국유사> '탑상(塔像)편 어산불영(魚山佛影)조'에 만어사 관련기록이 있다.
 
'고기에 이르기를 만어사는 옛날의 '자성산' 또는 '아야사산'이다. 그 옆에 가락국이 있었다. 옛날 하늘에서 알이 바닷가로 내려와 사람이 되어 나라를 다스렸으니, 곧 수로왕이다. 이때 그 영토 안 옥지(玉池)라는 못 안에 독룡이 살고 있었다. 만어산에 다섯 나찰녀가 있어 독룡과 서로 오가며 사귀었다. 그러자 때때로 우레와 비를 내려 4년 동안 오곡이 결실을 맺지 못했다. 왕은 주술로서도 이를 금하지 못하자 머리를 조아려 부처를 청하여 설법했다. 그제야 나찰녀가 오계를 받아 재해가 없었다. 그로 인해 동해의 고기와 용이 마침내 골짜기에 가득 찬 돌로 변해 각기 쇠북과 경쇠(옥 또는 돌로 만든 악기) 소리가 난다. (이상은 고기의 내용이다) 살펴보면 대정(大定) 12년 경자(庚子)는 고려 명종 10년(1180)인데 처음으로 만어사를 세웠다.'
 
가야불교 주창자들은 이 기록을 '만어사의 창건 시기를 수로왕대인 서기 46년으로 알려주는 중요한 내용'이라고 평가한다. 만어사를 김수로왕이 창건했고, 고려 명종 때인 1180년에 중창한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반면 기존 학계에서는 이 설화를 '불교 경전 중 하나인 <관불삼매해경>의 무대만 가락국으로 바꿔 거의 그대로 옮겨서 기록하고 있다'며 가야 때 만어사가 창건됐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것은 아니라고 반박한다. 서울대 조동일 명예교수는 <삼국시대 설화의 뜻풀이>에서 '수로왕이 주술로서 금하지 못했던 일을 불력의 힘을 빌려 해결했다는 내용으로 보아 가야 건국의 주체인 수로왕보다 오히려 부처의 위신력이 더 강조돼 있으므로 수로왕 당시의 역사적 사실로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고 지적했다.
 
고희(古稀)에 접어든 영남 불교계의 원로인 만어사 주지 호암 스님은 이런 주장에 아쉬움을 나타냈다. 그는 "신라는 자기정체성과 문화의 우수성을 강조하면서 가야의 흔적을 지웠다. 신라에 의해 가야사가 천편일률적으로 없어지면서 가야사와 가야불교사는 단지 과거의 이야기로 치부되는 경향이 있다. 만어사와 관련한 설화는 가야의 과거 찬란한 문화를 반추할 수 있는 소중한 기록"이라고 강조했다.
 
호암 스님은 "기존 학자들과 불교계가 가야사나 가야불교의 사실관계를 두고 다투는 것 자체가 서글픈 현실"이라고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그는 "시, 도, 문화재청 등에서 가야불교와 관련한 구전들이 기록돼 있다. 오히려 사실관계를 다투는 것보다 구전기록에 담겨 있는 내용을 민족문화의 소중한 자산이자 긍지로 인식하는 게 더 중요하다. 종교계, 학계, 기관이 머리를 맞대고 이를 널리 공유하고 느끼게 하는 방안을 생각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해뉴스 /만어사(밀양)=심재훈 기자 cyclo@gimhaenews.co.kr

저작권자 © 김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