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0년대만 하더라도 '야반도주의 마을'이었던 아야초는 이제 '유기농업의 마을'로 변신했다.

규슈 남동부에 위치한 미야자키현. 현청 소재지인 미야자키시에서 자동차로 1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아야초(綾 町:초는 우리나라 읍에 해당)라는 마을이 있다. 인구 9천 여명 정도의 작은 마을. 전체 면적의 80%가 산림지대이고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라고 해봐야 9% 정도밖에 되지 않는 곳이다. 지역 주민들은 벌목 작업으로 겨우 생계를 유지할 정도였다. 먹고 살 거리가 없으니 고향을 등지는 것은 당연지사. 그래서 한때 아야초는 '야반도주의 마을'로 악명 높았다.
 
그랬던 곳이 불과 20여년 만에 일본 유기농업의 상징이자 연간 150만 명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마을로 탈바꿈했다. 소설같은 이야기이지만 사실이다. 어떤 통계에서는 관광객 수를 300만 명으로 추산할 정도다. 일본에서 마을재건사업에 가장 성공한 사례로 생태관광의 명소가 된 아야초. 그 변화에 중심에는 1966년부터 1990년까지 무려 24년 동안 정장(町長:읍장)을 지낸 고다 미노루(鄕 田 實) 씨가 있다.
 
아야초 출신인 고다 미노루 씨는 1966년 아야초의 정장이 되었다. 당시 일본정부는 자원으로서의 가치가 적은 천연림을 베어내고, 관리가 쉽고 목재로서의 이용가치가 높은 삼나무나 노송나무 등을 심는 인공조림사업을 실시하고 있었다. 자연스레 아야초 주민들은 숯이나 펄프제조를 위한 벌목사업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고다 미노루 씨는 나무를 다 베어내고 난 다음은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할지가 걱정이었다. 이때 그는 아야초 면적의 80%를 차지하는 숲(조엽수림)에 주목했다. 이 숲을 살리는 것 만이 아야초의 미래를 기약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 믿었던 것이다. 그는 농림부장관을 만나 벌목사업의 중지를 요청했다. 어차피 큰돈이 되지 않는데다가 그다지 중요한 사안이 아니었기에 장관은 흔쾌히 허락했다. 허락을 얻어낸 것까지는 좋았는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여기서 그는 대규모 개발이라는 삽질 대신 주민들에게 호미질을 권장했다.
 
먹고 살 게 없던 '야반도주의 마을'
산림개발 대신 '채소밭 운동' 시작, 20여년만에 일본 유기농업 상징 변신

▲ 혼모노센터는 아야초 주민뿐만 아니라 일본 전국의 관광객들이 찾는 유기농산물의 명소이다.
우선은 먹고 살기 위한 최소한의 방편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1973년 고다 정장은 '한 평 채소밭 운동'을 제안했다. 그것도 모든 집에서 하도록 권고하고, 이에 소요되는 경비는 군청에서 부담했다. 그리고 농약이나 화학비료 대신 숲에서 나오는 천연비료를 사용하는 유기농업을 권장했다. 많은 반대가 있었지만 결국 주민들을 설득했다. 생산된 농산물 가운데 각 농가에서 소비하고 남은 것은 마을회관에 가져와 다른 사람이 사갈 수 있도록 했다. 교환되는 유기농산물의 양은 점차 증가했다. 그러다 1976년 '유기 농산물의 푸른하늘 시장'이라는 판매소를 개설했다. 유기농산물의 생산량은 점차 증가일로에 접어들었고, 아야초는 일약 유기농업의 마을로 전국적인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유기농산물 거래 '혼모노센터'
생산자와 소비자 교감 커뮤니티의 장, 연간 150만명의 관광객 방문

1989년에 만들어진 '혼모노센터'는 유기농업의 마을 아야초를 상징하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유기농산물뿐만 아니라 주민들이 생산한 수공예품과 유기농산물로 만든 가공식품과 도시락 등을 판매한다. 왜 '혼모노센터'일까? 혼모노(本物)란 우리말로 '진짜'를 의미한다. '혼모노센터'에서 판매되는 농산물에는 과연 어떤 먹을거리가 '진짜 먹을거리'인지에 대한 철학적 담론이 담겨 있다. 농약이나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방법으로 농사를 지었기에 '진짜'다. 팔기 위해 재배한 것이 아니라 내가, 내 가족이 먹기 위한 목적으로 재배되었기에 또한 '진짜'다. 대량 생산을 위해 찍어낸 것이 아니라 자급자족을 위해 주민의 손으로 직접 만든, 세상에서 유일한 것(only one)이기에 '진짜'다.
 
'혼모노센터'는 판매되는 제품들뿐만 아니라 그 제품이 놓여 있는 진열대조차 아야초에서 생산되는 원목을 사용하고 있다. 크고 세련된 마트에 길들여져 있는 여행객의 입장에서 보면 이 풍경 자체가 이채로울 수밖에 없다. 더불어 이곳 제품들에 브랜드 따위는 없다. 그저 생산자의 실명이 존재할 뿐이다. 따라서 혼모노센터에는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자본의 논리나 대기업의 화려한 마케팅 따위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 그래서 이 공간은 시장이기보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직접 만나고 교감하는 커뮤니티에 더 가깝다.
 

▲ 혼모노센터는 생산자가 직접 가격과 유통기한을 정하는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다.(왼쪽) 모든 제품에는 출하일자, 생산자명과 더불어 금, 은, 동이 표시되어 있다.(오른쪽)
혼모노센터에 진열된 농산물에는 출하일자, 제품명, 생산자명이 기록되어 있다. 헌데 어떤 제품엔 금(金)이, 어떤 제품엔 은(銀)이 적혀 있다. 아야초에서 생산되는 모든 농산물은 금·은·동 세 단계의 등급을 가진다. 금은 화학비료와 농약을 3년 이상 사용하지 않은 땅에서 재배한 농산물, 은은 2년간 종래의 농업 방식을 사용하면서 화학비료를 80% 줄인 농산물, 그리고 동은 은과 같은 방식이지만 화학비료를 70% 줄인 농산물이다. 하지만 제초제와 같은 농약은 은과 동의 경우에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유기농업이 정착단계에 접어든 때문인지 동(銅)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대부분의 농산물이 금과 은의 등급을 표시하고 있다.
 
동이 은이 되고, 은이 금이 된다는 것은 아야초의 땅이 그만큼 살아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땅은 현재의 주민은 물론이거니와 다음 세대의 건강한 삶을 약속하는 생생한 증거다. 자연은 항상 인간의 노력 이상의 것을 선물한다. 삽질 대신 호미질을 선택한 아야초가 받은 가장 큰 선물은 바로 '본래의 생명력을 되찾은 땅'인 셈이다.
 
마침 농작물을 납품하러 온 할아버지 한 분을 만났다. 혼모노센터에서는 농산물의 가격 결정과 제품 진열을 생산자가 직접 담당하는 자율시스템을 채택하고 있다. 자식처럼 애지중지 키운 생명들이니 그것을 다루는 손길이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유통기한 역시 생산자가 직접 결정한다. 이 낯선 풍경이 너무도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주위를 둘러보니 파 한 단, 배추 한 포기, 무 한 덩어리마다 생명의 숨결이 느껴졌다.
 
매장 중앙에는 '농산물출하등록생산자명단'이 있다. 여기에 등록된 생산자만이 혼모노센터에서 농산물을 판매할 수 있다. 대충 500여 명 이상이 등록되어 있다. 2005년 통계로 아야초의 농가 수는 총 413가구다. 물정 모르는 관광객이 봐도, 아야초의 전업 농가는 물론이고 비전업 농가들까지 혼모노센터에 물건을 납품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유기농업의 마을인 아야초의 명성이 허명이 아님을 이 명단은 보여준다.
 
아야초 지하수 '유명수 100선' 지정 후
소주 회사 유치해 테마파크 조성, 지역개발·환경보전 성공 타산지석

▲ '일본 유명수 100선'에 선정된 아야초의 지하수를 사용해 다양한 술을 생산하고 있다.

최소한의 식량 자급 기반이 확보되자 두번째로 선택한 것은 잘사는 마을 만들기였다. 1985년 아야초의 지하수는 일본 환경청이 주관한 '일본 유명수(有名水) 100선'에 선발됐다. 이를 계기로 아야초는 운카이주조(雲海酒造)라는 소주 회사를 유치한다. 유치 당시의 조건은 4가지였다. 첫째 수질보전에 힘쓴다. 둘째 주변 환경과 조화된 건물을 짓는다. 셋째 지역 주민을 최대한 고용한다. 넷째 공장 견학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지역관광에 이바지한다.
 
운카이주조는 네 가지 조건을 성실하게 이행했다. 단순한 공장 견학을 넘어 소주·청주·맥주·와인 등의 제조 공장과 시음장, 지역특산물 판매장, 식당, 온천 등을 묶은 '슈센노모리'라는 테마파크를 조성했다. 아울러 계절별로 금귤, 망고, 블루베리, 밤, 고구마, 딸기 등 지역의 특산물을 이용한 발포주를 생산함으로써 관광객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슈센노모리는 혼모노센터와 더불어 아야초의 대표적인 관광명소가 되었으며, 운카이주조는 일본을 대표하는 주조회사로 성장했다. 아야초와 운카이주조의 사례는 지역개발에 있어 지방자치단체와 기업의 협력 모델로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아야초의 성공 사례는 지역개발에 있어 몇 가지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첫째, 지역의 개발과 환경보전의 문제는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이라는 점이다. 일본 정부의 방침에 따라 조엽수림 벌채를 방치했더라면 단기적인 고용 효과를 기대할 수 있었겠지만 오늘날의 아야초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둘째, 자치단체장을 비롯한 지방정부의 확고한 의지와 장기적인 전망이 필요하다. 성장 위주의 개발 정책은 단기적이고 가시적인 효과는 거둘 수 있을지언정, 환경 파괴와 아울러 지역의 재생산 기반 자체를 무너뜨릴 수 있다.
 
셋째, 환경친화적인 지역개발을 위해서는 주민의 참여를 유도하고 개발의 혜택이 주민의 복지향상으로 환원될 수 있어야 한다. 지역 주민 역시 단기적인 개발 이익에 치우쳐 환경에 무관심할 수 있다. 그러나 환경친화적인 지역개발에 주민참여가 보장되어야만 참여 과정을 통해 환경의식을 고취시킬 수 있고 이것이 다시 환경친화적인 지역개발을 고무시키게 된다.
 
넷째, 지역개발에 있어서 기업의 역할이다. 아야초와 운카이주조의 협력관계에서 볼 수 있듯이 기업은 환경친화적 개발에 참여함으로써 지역사회에 이바지하고 기업의 성장도 동시에 달성할 수 있다. 
 



박상현 객원기자
사진촬영 = 박정훈 객원사진기자 punglyu@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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