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동아시아 불안한 현실 지적
한·중·일·대만에만 105기 가동
‘위험 경관’ 개념으로 다층 분석



"신고리 원전 5·6호기 공론 조사에서 부산·울산 등 원전 주변 주민들은 제외해야 한다."

최근 한국갈등학회 토론회에서 논란이 된 어느 학자의 주장이다. 직접적인 이해당사자여서 공정한 의견을 낼 수 없다는 그의 생각은 위험 평가에서 '객관성'이란 가치가 얼마나 비민주적으로 이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역으로, 수도권 주민들은 자신의 생활공간과 한참 동떨어진 지역의 일에 '객관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을까. 자신의 일상과는 상관없는 '남의 일'이란 인식이 작용할 여지가 크다. 원전 사고라는 심리적 불안감, 실질적인 피해 가능성 등 위험의 다층적인 면을 고려할 때 '미래 피해자'가 될지도 모를 당사자 의견이 가장 중요하다는 건 두말할 필요가 없다.

<위험도시를 살다>는 원자력 발전이란 위험에 기대 살아가고 있는 한국과 동아시아 국가들의 불안한 현실을 '위험 경관'의 개념으로 파헤친다. 세계적인 사회학자 울리히 벡의 '위험 사회' 개념에는 공간적 특성이 결여된 반면 데틀레프 뮐러만이 주창한 '위험 경관'은 공간성은 물론 위험을 바라보는 주체의 지각과 지식 등 개별적이고 다층적인 면을 포함한다. 하나의 원전을 놓고, 수백㎞ 떨어진 수도권 주민들과 반경 30㎞ 안의 부·울·경 주민들이 인식하는 위험 경관은 다를 수밖에 없다.

서울대 SSK동아시아도시연구단이 기획한 <위험도시를 살다>는 원전 문제를 비판적으로 고찰한 논문 10편을 모았다. 책은 1부 한국의 위험경관에 이어 2부에서 동아시아(일본, 중국, 대만)로 시야를 넓혀 해법을 모색한다. 원전과 대안 에너지는 더 이상 국내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 한·중·일·대만 4개국에서 가동 중인 원전만 105기에 이른다. 2020년엔 130기를 넘어서게 된다. 국경을 초월해 동아시아 전체가 하나의 '위험 공동체'가 된 것이다.

책은 원자력발전소를 국가주도 발전주의의 대표적인 상징물로 본다. 과거 박정희 정권은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67~1971)의 핵심 부문으로 원전 정책을 내세웠다. 한국 최초 원전인 고리 1호기 건설을 추진하며 지역주민들의 반발을 잠재우기 위해 국가 이익, 경제성, 안전성 같은 '중앙의 위험 경관'을 앞세운다. 당시 체신부에서 발행한 특별우표를 보면, 고리라는 구체적인 장소는 지워진 채 원전의 모습과 조국 근대화의 가치를 연결짓고 있다. 부산과 울산이 세계에서 유례없는 무려 10기(신고리 5·6호기 포함)의 원전을 옆에 끼고 살아가는 처지가 된 건 국익 우선의 위험 경관이 지역의 목소리를 압도한 결과다.

이처럼 위험 경관은 헤게모니 싸움 형태로 전개된다. 더욱이 중앙에서 활동하는 핵 마피아와 지역의 원전 찬성 세력인 지역성장연합(지역 경제단체·노동조합·언론 등)의 결합은 기존 구조를 더욱 공고하게 만든다. 지역성장연합은 지역경제를 살리기 위해 '차악'으로 핵 시설을 받아들이고, 대신 협상 테이블에 앉아 보다 많은 보상을 요구하는 전략을 택한다.

그렇다고 미래가 비관적이기만 한 건 아니다. 근래 탈핵을 둘러싸고 벌어진 갈등 양상을 보면 지역성장연합에 균열이 감지된다. 2014년 10월 강원도 삼척시는 정부의 신규 원전 부지 고시를 두고 자체적으로 찬반 주민투표를 해 85%에 육박하는 반대 의사를 확인했다. 이듬해에는 영덕에서도 주민투표를 진행했는데, 반대가 91.7%에 달했다. 밀양에서 벌어진 송전탑 반대 투쟁은 '탈핵 희망버스'를 탄생시키는 등 전국적인 반핵·반성장연합의 맹아가 되기도 했다.
 
부산일보 제공 김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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