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세훈 마르떼 대표

요즘 외식계와 음악계를 바라볼 때 재미있는 점이 보인다. 혼자 밥을 먹거나, 혼자 술을 마시는 문화, '혼밥과 혼술'이 새로운 소비 트렌드로 부상하는 반면, 둘 이상이 함께 연주하는 트리오와 콰르텟 같은 '앙상블'의 연주 형태가 호응을 얻고 있다.

바쁘게 지나가는 현대사회에서 직장인들이 함께 시간을 맞추기란 굉장히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혼자 서둘러 식사를 하고 술 한 잔을 기울일 수 있는 '혼밥과 혼술'은 매우 편리하다. 아예 식당을 개조해 1인석을 늘리는 현상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현상이 지속된다면 사회적인 문제가 되지는 않을까?

이러한 현상과는 반대로 독창과 독주의 형태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던 음악계에서는 오히려 모여서 연주하는 앙상블이 유행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유명 비올리스트 리차드 용재오닐도 '디토 앙상블'로 활동하고 있다. 첼리스트 요요마도 '실크로드 앙상블'이라는 프로젝트를 기획해 영화를 개봉하기도 했다.

연주자들은 일반적으로 앙상블의 어려움을 많이 이야기한다. 이는 연주자의 기술적인 문제가 아니라 호흡에서 오는 어려움, 바로 '함께'라는 관계의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혼자 연주하는 것이 더 편하고 쉽다'고 생각하는 연주자들이 더 많지 않을까 추측해 본다.

음악계에서는 그 '함께'라는 관계에 어려움이 있어도 '앙상블'이라는 연주형태가 많이 확산되고 있다. 이런 현상들이 가능한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시각 예술적 접근보다는 청각 예술적 접근을 우선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경청'이 필수요소이기 때문이다. 청각을 통한 듣기를 반복하면서 연주자들이 호흡을 같이 할 때, 여러 요소들이 조화를 이뤄 연주를 할 수 있는 단계까지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앙상블은 리더 혹은 곡의 첫 음을 연주하는 연주자의 숨소리로 시작한다. 다른 연주자들은 그 숨소리를 듣고 나서야 첫 음을 안정적으로 연주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시작한 연주에서는 연주자들이 저마다 소리내기, 소리듣기, 그리고 숨쉬기가 함께 이루어지는 '내적 앙상블'과, 다른 연주자들의 소리에 함께 반응해야 하는 '외적 앙상블'이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된다. 서로의 눈빛만으로 소통하는 수십 번의 음악적 긴장과 이완들의 반복, 그 속에서 스스로를 낮출 때와 혹은 더 세울 때를 조절해 가는 절제가 필요하다. 

앙상블의 필수요소는 바로 귀 기울임, '경청'이다. '함께'라는 관계의 출발에서 예술적 완성에 이르기까지 '경청'은 그 모든 과정의 전제가 된다. 음악적 개성이 넘치는 연주자들이 스스로를 더 내세우고, 빛나고 싶어하는 무대 위에서 오히려 서로의 숨소리와 악기소리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악보상의 음표들을 부(不)절제가 아닌 무(無)절제와 절제로 표현한다. 느림과 빠름의 반복 속에서 찰나에 귀 기울이면서 만들어가는 연주는, 음악적 배려가 살아 있는 예술적 앙상블로 완성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앙상블은 '함께'라는 관계로 이루어지며 '경청'이라는 메소드가 완성시켜 나가는 예술형태다.

현대사회의 '혼밥과 혼술' 문화는 '경청'의 부재가 낳은 현상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함께'라는 '나와 너' 혹은 그 이상의 관계에서 필요한 것은 함께 있는 것을 넘어 잘 들어주는 자세다. 바로 '경청'이 관계를 지속가능하게 해 주는 또 하나의 열쇠가 된다. 혼밥과 혼술을 '함께하고 싶고 귀를 기울이고 싶다'는 또다른 욕구가 낳은 현상으로 이해한다면, 어쩌면 그 자체가 타인에게 손을 내미는 작은 신호일 수도 있다. 이제부터 앙상블에서 답을 찾아보기를 권해본다. 김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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