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과에 올라가면 치과방사선학 강의가 있다. 말 그대로 방사선에 관한 전반적 지식과 더불어 기계적 장치와 방사선에 의해 나타난 이미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과목이다. 임상에서 이상이 있는 조직을 알기 위해서는 정상 조직의 이미지를 완전히 이해해야 한다. 알고 있듯 3차원의 물체를 2차원의 이미지로 그려내는 사진에 덧붙여 방사선은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를 포함하여 흑백의 음영으로 나타난다. 방사선의 이미지 즉 흑백의 사진을 볼 때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눈의 착시다. 주위가 다 밝은 부분 근처의 어두운 부분은 실제보다 더 어둡게 보인다. 그리고 당연히 어두운 곳에 있는 부분적으로 밝은 부분은 실제보다 더 밝게 보인다. 학생들의 눈(마침내는 치과의사의 눈)은 계속된 훈련을 통해 극복된다. 그런데 사실은 착시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착시로 보이는 부분을 정상으로 보는 훈련 혹은 세뇌를 통해 극복된다. 눈의 착시 현상은 우리의 이성으로 통제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시각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 반사 구체와 손 _ 1935
에피메니데스의 패러독스라는 게 있다. 기원전 6세기 경 크레타 섬에 살았던 것으로 알려지는 에피메니데스는 "모든 크레타 사람은 거짓말쟁이다"라는 명제를 남겼다. 그가 한 말이 진실이라면, 모든 크레타 사람은 거짓말쟁이이다. 그러나 에피메니데스 역시 크레타 사람이므로 그의 말은 거짓말이 되고 만다. 한편 에피메니데스가 한 말이 거짓이라면, 모든 크레타 사람은 거짓말쟁이가 아니다. 그렇다면 에피메니데스 역시 크레타 사람이므로 그의 말은 참말이 된다. 이와 같이 에피메니데스가 한 말은 동시에 참도 되고 거짓도 된다. 이 패러독스는 물론 착시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진실이라 굳게 믿는 눈에 보이는 이미지나 언어의 표현이 실제론 얼마나 허술한 기반위에 서 있는지 잘 보여주는 예이다.
 
여기는 헤이그 시내다. 독일의 쾰른에서부터 내비게이션을 보며 네덜란드 땅으로 들어와 오테를로의 멋진 국립공원 내에 있는 크뢸러 뮐러 미술관을 지나 헤이그 중심가 숙소 근처까지는 잘 찾아 왔다. 방금, 중앙선 건너편 왼쪽으로 숙소로 예약한 이비스 호텔 간판이 지나갔다. 됐다. 이제 적당한 곳에서 차를 돌려오기만 하면 된다. 유턴을 하기 위해 길을 좀 더 따라 가는데, 길이 일방통행으로 변한다. 이젠 왔던 길을 되돌아 갈 수 없다. 일단, 좀 더 들어가 보기로 한다. 이런, 분명 내비게이션이 일러주는 길을 따라 우회전을 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일까. 나도 모르는 사이 보행자와 자전거 전용 도로 위에 차가 들어와 있다. 거리로 내어놓은 의자에 앉아 느긋하게 차를 마시던 사람들이 쳐다본다. 황당하다는 표정이다. 당황스럽긴 나도 마찬가지다. 어찌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미궁으로 들어왔다. 일단 내비게이션을 껐다. 그리고 현재의 장소로부터 가능한 멀리 벗어나기로 했다. 조금씩 조금씩 바깥쪽으로, 그렇게 도심을 빠져 나왔다. 그리곤 다시 내비게이션을 켜고 천천히 숙소 길을 처음처럼 찾아 들어갔다.
 
▲ 그리는 손 _ 1948
네덜란드의 수도는 암스테르담이지만 행정부처와 국회는 헤이그에 있다. 상업적으로는 암스테르담이 가장 크고 발달된 곳이지만 각국의 대사관을 포함한 국제기구 등이 위치한 행정수도격인 헤이그가, 그러므로 실질적으로 네덜란드를 움직이는 엔진인 셈이다. 알고 보니 헤이그의 도심은 자동차의 접근이 불편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도심의 문턱 곳곳에 주차 빌딩을 만들어 놓고 차에서 내리게 한다. 그리고 도심은 가능하면 걷거나 자전거를 이용하도록 되어 있다. 그 대가는 좋은 환경이다. 헤이그의 도심은 한때 네덜란드 연방의 수도답게 운하를 따라 늘어선 고풍스런 건물과 함께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한다.
 
에셔 미술관을 찾아간다. 차는 주차장에 넣어두고 편하게 걷기로 한다. 백조가 떠있는 호수 옆으로 고풍스런 건물. 베르메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그림 펼침 막이 건물의 한 면을 크게 장식하고 있다. 마우리츠호이스 왕립미술관이다. 영화로 만들어질 정도로 유명세를 탄 베르메르의 그 그림과 함께 렘브란트의 걸작 '해부학 강의'가 소장된 미술관이다. 이곳 외에도 헤이그 도심에는 여러 다양한 미술관들이 모여 있다. 숙소에 헤이그의 미술관이란 안내책자가 따로 비치되어 있을 정도로 다양한 미술관들이 모여 있는 곳이 헤이그다. 헤이그를 네덜란드 최고의 미술도시로 소개하는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결코 과장이 아니다.
 
▲ 오름과 내림 _ 1960
어느덧 에셔 미술관이다. 앞뜰은 나무가 울창한 조용한 공원이다. 여왕의 모후 엠마의 궁전이었다. 그렇게 보아서 그런지 건물의 외관이 장중하다. 헤이그에 있는 여러 왕궁 중 유일하게 전시 등을 위한 공공의 건물로 사용되어오다 2002년 에셔의 작품을 영구적으로 전시하는 미술관으로 자릴 잡았다. 초현실적인 에셔의 그림과 장중한 궁전이라니. 마법처럼 오히려 잘 어울린다. 오전의 이른 시간인데도 미술관 안에는 관람객이 많다. 1층의 첫 전시실은 에셔의 초기 드로잉 작품으로 시작된다. 여행지의 풍경이다. 1922년 학교를 마치고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여러 곳을 여행다녔던 그다. 초기 풍경화 작품들은 후기작과는 달리 사실적이다. 하지만 24살 에셔에게 여행은 특별한 의미를 안겨준 여행이었다. 특히 스페인의 그라나다에 있는 알함브라 궁전은 그 스스로 고백했듯 훗날 에셔 작품의 원천이 되었다.
 
'드로잉 핸즈'라 제목 붙어 있는 1948년 작품은 눈에 익다. 여러 인쇄물에서 여러 번 보았다. 손을 그리는 손이다. 한참 보고 있으면 손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그리고 나아가 이 세상을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세상을 그리고(만들어가고) 있는데 또 누군가가 우리를 그리고 있다는 생각에 재미는 있지만 유쾌하진 않다. 1961년 작 '폭포'는 에셔의 눈의 착시에 관한 보고서 중 하나다. 우리의 이성은 떨어진 물이 다시 위로 올라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에셔의 그림에서는 분명 영원회귀를 하고 있는 물을 만난다. 물고기 모양과 새의 모양이 함께 그려진 '하늘과 물', 사람들이 끝없는 층계를 오르내리는 '오름과 내림' 등의 작품은 '폭포'처럼 구조적으로 현실에서 볼 수 없으며 오직 드로잉으로만 가능한 세계다.
 
미술관은 크지 않다. 하지만 촘촘하게 붙어 있는 작품을 보는 일은 금세 지치게 만든다. 거기다가 진짜 같지만 가짜인 세계, 익숙하지만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보면 쉽게 존재할 수 없는 공간이다. 이러한 낯선 세계는 보는 내내 묘한 불안감과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리하여 아무튼. 아이들은 재미있고 고정관념으로 머리가 딱딱해져 버린 어른들은 작은 미술관에서도 쉽게 지쳐버린다. 그곳이 에셔 미술관이다.


 


Tip. 기하학적 문양과 수학적 변용을 통한 착시 유발

*에셔(M.C Escher 1898-1972)
네덜란드 출신의 판화가이며 하를렘의 건축공예학교 시절부터 그래픽아트와 목판화에 전념하였다. 그의 작품은 이슬람의 패턴에서 영향을 받았다. 기하학적 문양 위에 수학적 변용을 가함으로써 변화하는 다양한 평면과 공간을 보여 준다. 그는 시각적 착각을 통하여 나타나는 인간의 인식에 관한 진실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리하여 익숙한 대상이지만 실제로 존재 하지 않거나 존재할 수 없는 공간을 보여줌으로써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낯선 세계에 대한 묘한 불안감과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작품들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1956년 최초의 개인 전시회를 열었으며 그 후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에셔 미술관(Escher in het Paleis)

여왕의 어머니인 모후 엠마 왕비의 겨울 궁전을 2002년 바꾸어 개관하였다. 지하는 카페와 식당, 1층과 2층은 전시실, 3층은 비디오 관람과 에셔의 착시 작품 등을 이용한 일종의 체험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에셔의 사후 그의 상속인인 세 아들의 손에서 미국의 아트 딜러에게 넘어간 작품들을 에셔의 생전부터 에셔 재단을 설립 꾸려왔던 헤이그 시가 모두 사들여 영구 전시관을 만들었다.
미술관의 각각의 방에는 로테르뎀의 예술가 반 벤템에 의해 디자인된 특별한 샹들리에가 미술관 관람에 새로운 즐거움을 더한다.

주소; Lange Voorhout 74 2514 EH Den Haag
전화; 070-4277730
개관시간 ;11:00-17:00 (월요일 휴관)
가는 길; 헤이그 기차역에서 트램 16, 17번 ( Korte Voorhout 정차)
http://www.escherinhetpaleis.nl






윤봉한 김해 윤봉한치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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