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퇴래천 너머로 보이는 낙산마을 전경. 비가 많이 오면 제방이 터져 마을주민들이 물난리를 겪었다.

 

벼농사 짓는 주민 104가구, 300여 명
동네 안 나무에는 감, 사과, 대추 달려

임진왜란 사충신 김득기 모신 ‘영모재’
지금은 쇠락해 아무도 위치조차 몰라

샘 마르지 않던 우물 덕 피란민 구제도
비 오면 화포천 넘쳐 물난리 피해 입어




"동네 사람들이 모두 물을 떠다 마시고 빨래를 해도 공동우물에는 늘 물이 풍족했습니다. 한국전쟁 때 옮겨온 피란민들이 식수로 사용하기도 했지요. 한 때는 이 우물이 마을의 보물이었답니다."

삼계동에서 진영읍 방면으로 10분쯤 달리면 안하농공단지를 가리키는 표지판이 보인다. 이를 따라 오른쪽으로 접어들면 한림면 명동리 낙산마을이 나타난다. 명동리는 봉황이 운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나중에 '울 명(鳴)'이 '밝을 명(明)'으로 바뀌면서 명동(明洞)이 됐다.

1914년부터 낙산, 두례, 인현마을을 합쳐 명동리라 불렀다. 그러나 올 초 인현마을의 일부였던 금음마을이 분리돼 마을은 4개로 늘었다. 최근 몇 년 사이 금음마을에 약 30여 채의 전원주택이 들어서면서 인구가 늘었기 때문이다. 저수지를 경계로 아래쪽은 인현마을, 위쪽은 금음마을이다.

낙산마을은 명동리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마을회관은 도로와 접해 있어 비교적 찾기가 쉽다. 먼저 와 기다리던 배종도(64) 이장이 기자를 반갑게 맞았다. 낙산마을에서 나고 자란 그는 마을의 과거사를 술술 풀어냈다.

현재 낙산마을에는 104가구, 300여 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분성배씨, 진양강씨, 김해김씨, 광주안씨, 의성김씨, 김해허씨가 많다. 주로 벼농사를 짓는다. 마을 안에 심은 나무에는 감, 사과, 대추 등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마을 한쪽에는 조선시대 호조참판 김득기(1549~1592년)의 묘와 그에게 제를 올리는 낙산재가 있다. 그는 1952년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김해를 지키다 전사한 사충신 중 한 사람이다. 낙산재는 1925년에 영모재(永慕齋)로 창건됐고 1955년 개축됐지만 지금은 많이 쇠락해 있다. 지금은 위치를 아는 사람조차 드물다.
 

▲ 마을 안 골목을 따라 죽 늘어선 주택들(왼쪽)과 1929년 한림면 최초로 세워진 이북초등학교.


배 이장은 "한림면의 이름이 이북면일 때가 있었다. 당시 마을 의용소방대가 군복을 입고 지리산 쪽으로 하계수련회를 갔다. 계곡에서 다른 지역의 사람들을 만나 시비가 붙었고 '어디서 왔느냐'는 상대측의 물음에 '이북'이라고 대답을 했다고 한다. 그랬더니 상대방이 경찰에 신고를 해버렸다"며 껄껄 웃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1987년 결국 한림면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낙산마을은 한 때 한림면에서 가장 번성했던 마을이다. 1914~1968년 이북면사무소(현 한림면사무소)가 마을에 있었다. 100년 전 세워진 면사무소 건물은 도로를 사이에 두고 마을회관 맞은편에 아직 남아 있다. 지금은 폐가다. 배 이장은 "나는 한국전쟁 휴전 직후 태어났다. 전쟁을 직접 겪진 않았지만 면사무소에 구호품들이 쌓여 있던 모습을 본 게 생각난다. 아주 커다란 우유 통이 있었다. 친구들과 함께 몰래 숨어서 먹었던 기억이 있다"고 말했다.

1929년에는 한림면 최초의 학교인 이북초도 세워졌다. 배 이장은 이북초 34회 졸업생이다. 현재 총동창회 회장직을 맡고 있다. 그가 학교에 다닐 때는 전교생이 700~800명쯤 됐다. 그 때는 마을에 인구가 늘 때여서 학교도 계속 생겨났다. 입학 당시에는 두 개의 학교(한림초, 안명초)가 더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는 신천초도 생겼다. 지금은 학생 수가 급감해 결국 신천초가 폐교되고 학생들은 이북초로 왔다.

배 이장은 "학교가 통합될 때 예산 30억 원을 지원받았다. 17억 원은 학교 건물 증축에 썼고, 남은 예산은 학생들을 위해 사용하고 있다. 지난해부터는 일본 등에 해외연수도 보내고 있다. 음악활동을 위한 악기도 샀다. 전교생 76명에게 골고루 혜택을 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 마을 가운데 위치한 공동우물.

이북초는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피란민들을 수용하기도 했다. 마을 가운데 위치한 공동우물이 당시 피란민들에게 큰 도움이 됐다. 600여 명의 피란민들이 다 마셔도 샘이 마르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은 공동우물을 사용하지 않아 물이 말라버렸다. 뚜껑도 덮어 놓았다. 주위를 감싸고 있는 녹슨 철 구조물만이 세월의 무게를 짐작케 한다. 

식수원이 풍부한 것은 좋았지만 마을이 화포천 유역에 있다 보니 해마다 물난리로 피해를 입기도 했다. 배 이장은 "비가 조금만 많이 오면 어김없이 퇴래천 제방이 터졌다. 수해가 나면 공병들이 마을로 나와 보트를 타고 사람들을 실어다 날랐다. 도로를 높이고, 5m 높이였던 둑을 9.2m로 높인 후 수해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약 20년 전의 일이다. 물론 둑을 높이면 피해를 예방할 수 있다는 건 그때도 알았다. 하지만 예산이 없었다. 그만큼 어려운 시절을 지나왔다"며 회상했다.

배 이장은 "학교가 인접해 한림면에 있는 마을 중에서는 그래도 공장이 적게 들어선 편"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러면서도 "면사무소가 이전할 때 반대하고 기존 시설을 확장시켰더라면 마을이 좀 더 발전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며 아쉬움을 내비쳤다.

김해뉴스 /이경민 기자 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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