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칠불사 전경. 1948년 여수·순천 사건 때 전소됐다 1978년부터 복원됐다.

 

수로왕 아들 7명, 장유화상 따라 수도
반야봉 운상원서 정진하다 모두 성불

사찰 앞 연못 ‘영지’에도 설화 전해져
범왕·대비마을 이름도 가야불교 연관

통일신라 이후 고승 머물러 ‘동국제일’
수시로 쇠퇴 거쳐 70년대 통광스님 복원




가야불교가 금관가야를 넘어 경상도 동쪽 끝자락인 지리산까지 확산됐음을 보여주는 현장이 바로 '칠불사(七佛寺)'다.

경남 하동군 화개면 범왕리에 있는 칠불사는 지리산 제2봉인 반야봉(1732m) 남쪽에 자리한다. 정확하게 쌍계사 북쪽 20리의 토끼봉(1533m) 아래 800m 지역에 있는 사찰이다. 연기설화에 따르면 보옥선사(장유화상)를 따라 출가한 가락국 수로왕의 일곱 왕자가 지리산에 '운상원(雲上院)'을 짓고 수행하다 6년 만인 103년 8월 보름에 성불했기 때문에 '칠불암'으로 이름을 고쳤다고 한다. 이런 창건설화 때문인지 칠불사 본전인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불 오른쪽 벽에 대형 칠불을 모시고 있다. 이곳에서 성불한 일곱 왕자를 형상화한 불상이다.

칠불사는 통일신라 이후 금강산 마하연선원과 함께 '동국제일선원'으로 불렸다. 그만큼 이름 높은 고승들이 머물렀다고 전해진다.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끈 서산대사도 그 중 한 명이다. 임진왜란 때에 퇴락한 절을 서산대사와 부휴대사가 중수했다. 1800년 큰 화재가 나서 보광전, 약사전, 미타전, 벽안당, 칠불각, 설선당, 보설루 등 10여 동이 전소되기도 했다. 이후 대은율사와 금담율사가 절을 복구했다.

칠불사는 1948년 여수·순천 사건 때 전소됐다. 이후 30년 동안 폐허로 방치돼 있었지만, 제월통광 스님이 1978년부터 15년간 걸쳐 불사를 진행해 복원했다. 대웅전·문수전·아자방·운상원·설선당·보설루·원음각·요사·영지·일주문 등을 중창했고, 선다원·사적비·다신탑비 등도 세웠다.

칠불사 주지 도응 스님은 "4년 전 입적한 통광 스님은 전남 화개 출신이었다. 학문적으로 덕이 높고, 사회적으로도 존경받는 어르신이었다. 전국에서 불자들이 성지 복원에 관심을 보이고 지역사회도 뒷받침해 폐허에 칠불사를 복원할 수 있었다. 가야불교와의 관련 덕분에 김해김씨와 허씨 문중도 드러나지 않게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김해김씨인 김대중 전 대통령도 야당 정치인 시절 절을 찾았다고 한다"고 전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수로왕은 아유타국 공주 허왕옥과 사이에 10남 2녀를 뒀다. 후대 기록에 따르면 그 중 장남은 왕위를 계승했고, 둘째와 셋째 왕자는 어머니의 성을 이어 받아 김해허씨의 시조가 됐다. 나머지 일곱 왕자는 외숙인 장유화상을 따라 출가했다. 그들은 장유화상의 가르침을 받으며 경남 합천 가야산에서 3년 간 수도하다 의령 수도산, 사천 와룡산 등을 거쳐 101년 지리산 반야봉 아래에 운상원을 지었다. 이들은 운상원에서 정진한 지 2년 만에 모두 성불했다. 이들의 이름은 금왕광불(金王光佛), 금왕당불(金王幢佛), 금왕상불(金王相佛), 금왕행불(金王行佛), 금왕향불(金王香佛), 금왕성불(金王性佛), 금왕공불(金王空佛)이라고 전한다.
 

▲ 칠불사 대웅전 오른쪽 벽에 걸린 대형칠불. 이곳에서 수도해 성불했다고 하는 수로왕의 일곱 왕자를 기리는 작품이다.


일곱 왕자가 수행하고 성불한 곳은 '옥보대'다. 현재 스님들이 수행을 하는 운상선원 또는 대웅전 뒤편 숲길 사이에 평상이 있는 100여 평 남짓 평평한 자리가 옥보대의 유력한 후보지다. 보옥선사가 일곱 왕자를 데리고 와서 공부를 시킨 곳이라고 해서 후대 사람들이 '보옥'이라는 이름의 앞뒤를 바꿔 옥보대라고 했다는 주장이 있다. 신라시대 거문고 전승자인 옥보고가 이곳에서 50년 동안 거문고를 연구했으므로 그 이름을 따서 옥보대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

도응 스님은 "칠불사는 지리산에서도 남쪽으로 따스한 햇볕이 비치는 최고 명당자리다. 그런 만큼 일곱 왕자가 지리산에 들어와 옥보대에서 성불했다는 이야기는 충분히 개연성을 가진다.  칠불사 인근은 과거 영남과 호남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금관가야에서 출발한 일곱 왕자가 이곳까지 오는 과정은 가야가 선점한 불교문화가 인근 지역으로 확산되는 과정이었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시조작가이자 사학자였던 노산 이은상 선생은 1938년 펴낸 <지리산 탐험기> 칠불사 편에서 '가락국 수로왕대에 불교가 전래됐던 것이냐 하는 문제가 생겨나게 되는 바,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고구려 불교전래의 연대인 372년보다 앞선 270년이라 이를 신뢰하기 어렵다 할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에도 그 이전 불교가 있었던 자취가 발견될 뿐 아니라, 가락국의 불교는 삼국 어느 것을 통한 것이 아니라 바다로부터 별도로 전래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도 없지 않다'고 밝혔다. 그는 '보옥 명인과 그를 따라온 칠 제자들은 다 가락국의 인물들이요, 또 설사 수로왕대까지 못 올라간다 하더라도 지리산이 가락국 판도에 있던 시대의 일로 보아 무방할 줄 안다'고 덧붙였다.

가야불교와의 연결고리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칠불사 경내에 있는 연못인 '영지(影池)'와 칠불사 인근 지역에 남아 있는 명칭을 통해 칠불사가 가야불교와 깊은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칠불사의 영지는 일곱 왕자의 그림자가 나타났다는 연못이다. 수로왕 부부가 출가한 일곱 왕자를 만나기 위해 칠불사에 갔다. 장유화상은 "왕자들은 이미 출가하여 수도하는 몸이라 결코 상면할 수 없다. 꼭 보고 싶으면 절 밑에 연못을 만들어 물 속을 보면 된다"고 했다. 장유화상의 말에 따라 수로왕 부부는 연못을 만들어 연못을 보니 과연 일곱 왕자들의 그림자가 나타났다고 한다. 이 후 '그림자 영(影)'이라는 이름을 붙여 연못을 영지라고 부르게 됐다.

▲ 제월통광 스님이 불사로 복원한 원음각, 칠불사의 내력을 기록한 사적비와 조선 중기의 부도탑, 일곱 왕자의 그림자가 비쳤다고 전하는 '영지'(위로부터).

칠불사 인근 범왕(凡王)마을과 대비(大妃)마을도 칠불사가 가야불교와 관계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로 거론된다. 범왕리라는 명칭은 수로왕이 칠왕자를 만나기 위해 임시 궁궐을 짓고 머무른 데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범왕마을은 예로부터 지리산 기슭 하늘 아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마을이라고 불릴 정도로 높은 지역에 자리잡았다. 과거 범왕사가 있었기 때문에 범왕리가 됐다는 설도 있지만 마을 사람들은 수로왕과 허왕후가 머물렀다는 사실을 믿고 있다. 화개면 정금리 대비마을의 이름은 허왕후가 아들을 만나기 위해 머물렀다는 데에서 비롯됐다고 전한다.

범왕리에서 가장 오래된 자연부락인 원범왕마을에서 나고 자란 이몽실(79) 씨는 "조상 대대로 이곳에 수로왕과 허왕후가 머물렀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칠불사와 가야불교의 내력을 알려주는 철로 된 비문이 마을 인근에 묻혀있다고 해서 이를 찾으려고 김해김씨 사람들이 많이 다녀갔다"고 말했다.

1632 편찬된 <진양지(晉陽誌)>에  화개의 10개 마을 중 하나로 '범왕촌'이 기록될 정도로 지리산 자락에서 널리 알려진 마을이었다. 조선시대 실학자 이중환이 쓴 <택리지>에도 '지리산은 남해에 가까우므로 기후가 따뜻해 산 속에 대나무가 많다. 감나무와 밤나무도 매우 많아 저절로 열렸다가 저절로 떨어진다. 기장이나 조를 높은 산봉우리 위에 뿌려두기만 해도 무성하게 자란다. 평지 밭에도 모두 심으므로 산 속에는 사람들이 중과 섞여 산다. 중이나 속인들이 대나무를 꺾고 감과 밤을 주워 수고하지 않아도 생계가 넉넉하다’고 돼 있다.

칠불사는 9세기말 신라 효공왕 때 담공선사가 선방인 벽안당에 만든 '아자방(亞字房)'으로도 유명하다. '아(亞)'자 모양으로 놓은 구들은 불을 한 번 때면 온기가 100일 간 지속된다는 불가사의를 지닌 방으로 중국 당나라에까지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1948년 불에 타 사라졌다가 1983년 복원됐고, 현재 재복원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방 구조의 탁월한 과학성을 인정받아 1979년 세계건축협회에서 펴낸 <세계건축사전>에 수록되기도 했다.

김해뉴스 /하동(경남)=심재훈 기자 cyc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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