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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가야 대형 건물터 발견, 지배계층 유물 다량 출토
  • 수정 2017.12.06 10:59
  • 게재 2017.11.29 10:07
  • 호수 349
  • 11면
  • 이경민 기자(min@gimhaenews.co.kr)
▲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지난 22일 금관가야 추정왕궁지 ‘김해 봉황동 유적’에 대한 발굴성과를 공개했다.


봉황동 왕궁 추정지 발굴 설명회
고급 토기, 각배 등 상류층 사용 추정
가야인 주거·음식·제사문화 알려줘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지난 22일 금관가야 추정왕궁지인 김해 봉황동 유적지에서 현장설명회를 열고 발굴성과를 공개했다. 이날 현장에는 학계 관계자와 주민 등 70여 명이 모였다. 
 
김해 봉황동 유적은 대성동 고분군과 수로왕릉의 남쪽, 봉황대 구릉 및 주변 일대에 분포한다. 이곳은 1899년 편찬된 <김해군읍지>의 수로왕궁터 기록을 근거로 전기가야의 맹주국인 금관가야(42~532년)의 왕궁 및 도성 내부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는 김해 회현리 패총과 봉황대 유적을 포함해 사적 제2호로 지정된 상태다.  
 
연구소는 올 3월부터 진행한 발굴조사를 통해 봉황동 유적의 동쪽 지점에서 전체적인 층위 양상을 발견했다. 특히 지하 4.5m 깊이의 기반 층에서부터 지표면까지 분포된 시대별 문화층(특정시대의 문화양상을 보여주는 지층)을 처음 밝혀냈다.
 
삼한시대의 민무늬토기가 출토된 문화층과 가야의 건물터·소성유구 등이 중복된 문화층, 통일신라~조선시대 문화층 등이 확인된 것이다. 
 
가야문화층인 깊이 1.5~3m 지점에서 4세기 말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대형 건물터 10여 기도 발견됐다. 대개 지름 10m 이상의 건물터들이 일정 구역 내에서 밀집된 모습을 보인다. 가장 큰 3호 건물터는 폭이 15~12m로 추정된다. 바닥이 타원형이며 둥글게 벽을 두르고 내부에 기둥을 세운 형태의 벽주 건물지이다. 앞서 1999년 부산대박물관 조사에서도 인근에서 벽주건물터 1기가 나왔다.
 

▲ 민경선 학예사가 주민들을 대상으로 출토된 유물을 설명하고 있다.

유물로는 가야 유력계층이 썼을 고급토기들이 수백 점 쏟아졌다. 화로형토기, 통형기대, 각배, 토우 등 의례용 유물들이다. 화로형토기는 김해 대성동고분군의 수장급 고분에서 출토된 것과 모양이 비슷하다. 통형기대는 긴 원통을 세워둔 모양의 그릇받침으로 지금까지 확인된 것과는 다른 독특한 형태를 띤다. 특히 고분이 아닌 생활유적에서 발견된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다. 각배는 뿔 모양의 술잔을, 토우는 흙으로 만든 인형을 의미한다. 
 
이 유물들은 지난해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차륜형 토기, 구슬·곡옥 등의 장신구와 함께 봉황동 유적을 점유했던 집단이 금관가야의 지배계층이었음을 시사한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김삼기 소장은 "그동안 벌인 발굴조사는 대부분 고분 중심이었다. 고분은 마운드가 있지만 생활유적은 지하에 묻혀 있기 때문에 확인이 어렵다. 개발하다가 발견이 되거나 목적을 갖고 조사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번 조사는 생활유적인 집터, 토기 등을 통해 당시 가야인의 주거·음식·제사 문화 등을 엿볼 수 있어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한편 김해 봉황동 유적과 주변 일대에서는 일제강점기인 1900년 초부터 현재까지 70여 차례의 발굴조사가 이뤄졌다. 그 결과 청동기~삼국시대의 생활상을 추정할 수 있는 주거지·토성을 포함한 생활유적과 야철지·토기가마터 등 생산시설, 고상건물터·항구 접안시설과 같은 교역관련 시설 등 다양한 유적들이 복합적으로 확인됐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지난 2015년 9월부터 봉황대 구릉 북동편 평탄지 일대에 대한 발굴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금관가야 왕궁의 존재를 입증할 만한 유물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지만, 그 가능성을 보여주는 유적과 유물이 잇따라 출토되면서 향후 발굴조사 결과에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김해뉴스 /이경민 기자 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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