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들인다는 건 상처이든 슬픔이든
함께 견뎌주는 힘

'가령 네가 오후 4시에 온다면, 나는 3시부터 벌써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점점 더 행복해지겠지.'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서 여우가 어린왕자에게 하는 말이다. 아름다운 사람을 기다린다는 것은 가슴 부푸는 설렘이고 행복한 초조함이다. 작품 속 여우는 어린왕자를 기다리며 나에게 아름다운 설렘을 선물했다.
 
내가 어린 왕자를 만난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그날도 학교가 파하고 단짝과 함께 교문을 나서는데 담임선생이 우릴 불렀다. "선생님 집에 놀러가자." 선생님은 학교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홀어머니와 살고 있었다. 커다란 호기심으로 찾아간 우리를 맞이한 건 호호백발의 할머니였고, 작은 부엌에서 밥과 김치를 먹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지만 잔뜩 기대했던 밥상은 아니었다.
 
방에는 빼곡히 책뿐이었다. 내 시선을 따라 또렷이 보이는 책표지에는 장미꽃에 물을 주고 있는 어린 왕자가 별나라 여행을 하고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안녕, 내가 말을 걸기도 전에 담임선생님은 '어린왕자'를 뽑아 내 손에 쥐어주셨다. 그날부터 나는 어린왕자에 빠져들었다. 어린왕자와 함께 사막의 별을 여행하는 시간 동안은 금방 내 키가 컸다. 선생님께 처음 받은 선물은 표지가 닳도록 오래 나를 달뜨게 했다.
 
생텍쥐페리가 '어린왕자'를 발표할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이었다. 역경의 시대에 척박한 삶을 아름답게 노래하기란 쉽지 않다. 작가는 진정한 의미의 삶이란 개개인의 존재가 아니라, 존재를 초월한 사랑과 맺어주는 정신적인 유대에 있다고 말한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포용하는 과정에는 '길들이기'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어린왕자가 주는 상징적인 메타포는 저마다 다른 별을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상실된 인간의 순결성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단순하고 평화로운 상상으로 묘사되는 문장이지만, 그 배면에 폭로되는 후장의 삶이 가지는 의미는 통념적이고 관념적인 우리의 의식을 뒤흔들어 놓는다.
 
꽃이나 식물을 기르는 것처럼 사람과의 관계 또한 물주기가 필요하다. 아무리 신생을 노래하며 거대 담론을 펼친들 무엇이 진실이며 무엇이 예의인지도 모르는 이기적 자아가 만연한다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작가는 명상에서 비롯된 행동적인 문학을 추구했다.
 
작가는 작은 별에서 혼자 살아가는 어린 왕자를 통해 아주 좁은 별에 살고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의자를 약간만 돌려도 해 지는 것을 하루에도 수없이 볼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걸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투덜대는 장미에게도 끝없이 물을 주고 바람을 막아주는 인내를 가르쳐 주었다. 무언가를 길들인다는 건, 그것이 상처이든 슬픔이든 내 속에 물들 때까지 함께 견뎌주는 힘이라는 걸 가르쳐 주었다.
 
그때 선생님이 말없이 손에 책을 쥐어준 것처럼 사막의 별 여행을 함께 하고 싶다. 유년의 그때처럼 순수하고 맑은 눈으로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면 '어린왕자'를 선물하고 싶어진다. 지금 내 별에서 만나는 사람은 모두 아름답다.
 


>> 송인필은
1960년 부산 생. 1995년 '시문학' 우수작품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시집 '비밀은 바닥에 있다'를 발표했다. 푸른시학상을 수상했다.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 시문학 시인회 회원, 김해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현재 김해 삼계동에 살며 시를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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