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 '아리안 신화' 이용
시진핑 중일전쟁 연구 강화 지시
공산당 반민족적 행위 은폐 노력



'민주주의와 인권, 관용의 가치를 퇴색시키고 시민들의 이성과 상식을 질식시키려는 권력자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이를 위해 무엇으로 시민들을 유혹하는지, 시민과 지식인들은 이에 맞서 어떻게 저항해야 하는지를 고민했다.'
 
<권력은 왜 역사를 지배하려 하는가-정치의 도구가 된 세계사, 그 비틀린 기록>의 저자 윤상욱은 '국민을 영원히 길들이려는 권력자들이 역사를 어떻게 이용하는가'에 관한 이야기라고 이 책을 소개한다. 직업 외교관인 저자는 히틀러의 자기 신화화,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과 미국 우선주의, 이라크와 시리아의 이슬람국가(ISIS)의 등장과 서구 청년 유혹, 시진핑과 푸틴의 역사 미화 정책, 헝가리의 이슬람 난민 거부 등 우리에게 충격을 안겼던 정치적 이슈들을 통해 국민의 기억과 사고를 획일화하려는 권력의 시도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현실적 감각과 분석 위에서 엄중히 경고한다.
 
19세기 유럽의 지배자들은 역사가들과 결탁해 민족의 특수한 상징과 기억을 연구하고 그것을 대중에게 집요하게 제시했다. 자기 민족이 다른 민족들에 비해 얼마나 영광스러운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는지, 다른 민족들이 어떻게 자기 민족을 위협해 왔는지, 왜 국가에 충성하고 다른 민족에 맞서 싸워야 하는지를 인식시킨 것이다. 말하자면 권력은 과거의 기억을 활용해 국민을 조종하고 자신의 지위와 명분을 더욱 공고히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전통 위에서 히틀러는 '아리안 신화'를 이용해 독일 국민들을 유혹했다. 고대에 아리안이라는 민족이 북방에서 내려와 인류 문명을 창조했고, 그들의 혈통을 가장 순수하게 간직한 것이 바로 독일의 게르만 민족이라고 설파했다. 나치 시절의 교과서는 게르만을 통합하고 저급한 인종으로부터 보호했던 초인적 지도자가 재림할 것이라는 암시를 줘 히틀러를 영웅시했다. 나치는 독일인이 믿고 싶어 하는 것을 역사적 사실처럼 조작한 것이다. 이탈리아에서 베니토 무솔리니가 과거 융성했던 로마제국의 영광을 재현하려고 노력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중국의 경우도 '중일전쟁에 대한 연구를 강화하라는 시진핑의 지시 역시 중일전쟁 당시 벌어졌던 공산당의 반(反)민족적인 행위는 은폐하는 동시에, 공산당이 항일전쟁을 주도했음을 뒷받침하는 사례를 축적하려는 것'이라고 저자는 분석한다. 저자는 또한 러시아 정부는 2차 세계대전에 '위대한 애국전쟁'이라는 공식 명칭까지 붙여 소련이 나치의 피해자이며 2차 세계대전은 조국을 방어하기 위한 애국전쟁이었다고 강변하고 있는데, 이는 '기억의 은폐와 축소'에 의한 반쪽짜리 역사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이 모든 것이 소련 몰락 이후 발생한 이념의 공백을 메우려는 반(反)역사적인 정치적 공작이라는 것이다. 1990년대 이후 서구화의 길에도 실패하고 다시 사회주의로도 돌아갈 수 없었던 러시아 국민들에게 왜곡된 '승리의 기억'을 선사하려 했다는 설명이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반(反)이민 정책, 멕시코 국경 장벽 건설, 오바마 케어 폐지를 위한 행정명령, 파리 기후변화협약 탈퇴, 무역수지 적자 해소를 위한 무역협정 재검토 등 탈(脫) 도덕적인 미국 우선주의 정책들에 지지자들은 열광한다. 트럼프가 당선된 것도 도덕적 굴레를 집어 던지고 세계화와 자유화로 인해 불이익과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하는 유권자들에게 미국과 미국인이 얼마나 고통받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토로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로 인해 그간 미국의 정체성을 유지해 왔던 미국 예외주의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고, 미국 허무주의 시대가 이어질지도 모른다고 저자는 전망한다.
 
결국 역사 논쟁은 정치 논쟁으로 귀결된다고 이 책은 힘주어 말한다. 권력자들은 역사적 사실을 조작하고 이용해서 자신의 정치적 명분을 민족의 역사와 동일시하고 대중을 선동한다는 것이다. 국민을 변하지 않는 지지층으로 만들어 영원한 권력을 취하고 싶어 하는 것이 권력자의 속성이지만, 모든 인간이 똑같은 기억과 생각을 가진 사회는 그야말로 '디스토피아'라며 저자는 경계의 시선을 놓지 않는다.

부산일보 /백태현 선임기자 hyun@busan.com

저작권자 © 김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