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져가는 우리말'을 아쉬워하며 그 말을 살려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설마 우리가 일부러 우리말을 잊고 싶어서 잊었겠는가. 말이 없어지는 건 행위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물건을 사용하거나 행위를 하지 않으니 자연히 그 말을 쓸 일이 없어지고, 점차 사람들의 세상 속에서 설 자리가 없어져 잊혀진 것이다.
 
해가 지도록 동무들과 어울리며 놀던 아이들이 사라지면서 고누, 땅따먹기, 자치기, 술래잡기, 돌치기, 공기, 비석치기 같은 말들도 함께 잊혀져 갔다. 요즘 아이들은 학교와 학원으로 끌려 다니거나 어쩌다가 시간이 남아도 같이 놀 동무들이 없거나 무얼 하고 놀아야 할지 모른다고 한다. 아이들이 즐겁게 노는 동안 저절로 몸의 감각을 익히고 규칙을 지키고 승패를 인정하는 사회성을 배우는 놀이가 사라져가는 것을 걱정하는 사람들에 의해 '놀이를 노는' 방법에 대한 책이 나오고 있고, 공부를 배우듯이 놀이를 배우는 과정을 만든 학교도 있다지만, 아이들의 놀이와 놀이에 관련된 말까지도 차츰 잊혀져 가고 있다.
 
이렇게 우리 기억 속에서 사라진 일들과 말들은 얼마나 많을까. 야생화 시집 <풀꽃>을 발표하며 '야생화 시인'으로 알려진 김종태 시인이 펴낸 산문집 <옛 것에 대한 그리움>은 지난 세대 삶의 모습과 그 삶을 나타내었던 우리말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하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난 1953년 서울 변두리에서 태어난 저자는 어렸을 때 보고 자란 많은 풍경들이 점차 사라져 이제는 민속박물관에나 가야 만날 수 있게 된 것을 안타까워하며 이 책을 썼다. '잊혀져가는 거의 모든 것의 아름다운 풍경'이라는 부제에서는 제목으로 다하지 못한 저자의 애틋한 마음이 느껴진다.
 
풍습과 풍물, 정서가 사라지는 것을 아쉬워하며 쓴 글에서 함께 잊혀졌던 말들을 저자의 글에서 다시 만나는 반가움도 책 읽는 즐거움 중의 하나이다. 여인네들의 머리모양 중 하나인 '쪽'을 설명한 대목을 잠깐 살펴보자.

"머리에 동백기름을 바른 후 굵고 성긴 반달얼레빗으로 얼추얼추 빗은 후 촘촘한 참빗으로 머리빡이 얼얼할 때까지 빗어 내렸다. 모든 어수선함을 다 떨쳐내면 마음까지 정결해졌다. 탕개 죄듯이 꼼꼼히 땋아 내린 머리채를 옥죄어 비틀어 감아 뒤통수에 붙이고 은비녀나 옥비녀로 가로질러 꿰어 놓으면 야무진 마음에는 어떤 잡념도 범접을 못했다."
 
면경을 앞에 두고 머리를 빗어 내리는 손길과 그 마음까지 보이는 듯 한 글 속에는 반달얼레빗, 참빗의 모양과 쓰임새까지도 설명되어 있다. 저자의 말처럼 민속박물관이나, 사극 드라마나, 한국의 문화를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진 영상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에서 되살아나는 우리말이다.  옛 향수를 느끼게 하는 글 한 편 한 편의 제목에서도 저자의 정성은 나타난다. '정화수 · 행여 부정 탈까', '반닫이 · 손때 기름때 거무죽죽 반지르르', '화로 · 문풍지에 떨던 외풍 수줍어 스러지다', '조리 · 한 알갱이라도 놓칠까 보냐', '눈깔사탕 · 한나절이 달짝지근', '멍석 · 퍼질러 앉아 한바탕 펼친다', '툇마루 · 눈부신 햇살 아래 하늘을 본다' 등 소제목을 설명한 문장만 봐도 기억 저편 그 시절이 눈앞에 펼쳐진다.
 
저자와 함께 추억 속 물건을 더듬어가는 동안, 우리가 현재를 쌓아올리는 과정에서 등한시하고 소홀하게 내쳤던 것들은 정말 쓸모없고 시대에 뒤떨어지고 고리타분하고 불편하기만 했던 것인지 저절로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이 책의 진정한 역할이다. 물건이 사라지고, 말이 잊혀지고 나면 그 다음에 소멸될 것은 혹시 정신이 아닐지도 함께 생각하면서 읽어볼 책이다.

 


박현주 객원기자
북칼럼니스트, 동의대 문헌정보학과 강사· 

 

저작권자 © 김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