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권 시인

무술년 시작인가 싶더니 벌써 이월이다. 이월의 몸짓을 벗긴 시간은 모두에게로 가 닿아서 푸른 생명이 되어 일어선다. 흐르는 세월을 유수 갔다고 했던가? 잠시 고였다가 나에게서 떠나는 시간, 물꼬가 터진 것이다. 굽어 치거나 휘어지는 이 물꼬는 어떤 꿈을 꾸면서 나에게로 오는가? 혹은 너에게로 가는가? 흐르는 것에는 해와 달의 지문이 찍힌 물꼬가 있다. 김해들판에는 무수한 물꼬가 있다. 비 오는 날, 아버지를 따라 좁다란 방죽 길을 다라 다닌 적이 있지만, 지금은 대도시 풍경 속에서 잊혀 가는 것이 터야 하는 물꼬인 것이다.

물꼬는, 흘러내리는 논물을 가두었다가 적당한 높이의 흙을 쌓아두면 일정량의 물은 고이고 나머지는 아래로 흘러가는 물의 길인 것이다. 거침없이 흘러들었다가 또, 그 아래로 흘러가는 물꼬에는 무한한 생명력이 자라고 있다. 흐르지 않으면 말라 버리는 그 아래, 물꼬의 힘은 대단한 것이다. 이러한 물꼬는 사물과의 친화력을 가지면서 합일과 배분의 생명력을 키우고 있다. 나락이 자라고 보리가 자라고, 만물이 자라서 모두에게로 가는 길이 되는 것이다.

물꼬를 튼다는 말은 푸르게 소통한다는 말이다. 사람과 사람사이, 자연과 자연사이, 이 모든 것에는 서로 연결된 끈이 있어 이것이 풀어지고 모이는 곳이라 할 수 있다. 흐르는 것에는 단절이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모두 무엇에게로 연결 되어 있다. 먼 길을 가다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과의 인연, 또는 밥 한 그릇 같이 먹은 사람들과의 오묘한 인연 속에서 서로의 마음을 터야 하는 물꼬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꽉 막혔던 너와 나의 경계를 허물고 사람이, 들판이 푸르게 일어서는 소통의 길인 것이다.

물꼬를 튼다는 말은 소리 없이 스며든다는 말이다. 땅으로 빗물이 배어들듯이, 봄바람이 옷 속으로 여며 들듯이 소리 없이 찾아 든다는 말이다. 스민다는 말은 따뜻하다는 말이다. 너에게서 내가 스미고 나에게서 네가 스민다면 이 세상은 따뜻한 계절이 될 것이다. 안도현 시인은 꽃게 속으로 스미는 간장을 시로 노래하였다. 밥도둑인 간장게장에 스미는 침울한 현상도, 어쩔 수 없이 오는 숙명적인 이 순간도 스밈에서 오는 것이리라. 이월도 일월이 스며서 물꼬를 튼 것이다.

물꼬를 튼다는 말은 젖어 든다는 것이다. 물에는 감정이 없다. 그러나 너에게로 젖어서 가는 것에는 슬픔과 따뜻함, 비애가 함께 숨어있다. 어느 노동자가 한여름 땡볕에 땀으로 범벅이 되어 하루를 보내는 것도 젖어서 가족에게로 가는 길인 것이다. 그 길에는 말 못할 노동의 숭고함이 젖어있다. 사랑에도 열렬함이 배어있다면 사랑을 찾아 가는 길에서는 젖어서 간다. 보름달이 뜨는 창가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는 것도 달빛에 흠뻑 젖는 일이다. 달빛에 젖어가는 순백의 사랑, 그 아름다운 사랑에는 마르지 않는 달의 온유함이 묻어있는 것이다.

물꼬를 튼다는 말은 나의 말이 너에게로 번진다는 말이다. 낮의 말이 번져서 은근한 밤이 되듯이, 밤이 번져서 푸른 낮의 말들이 되듯이, 그렇게 번져간다는 것이다.  나의 궤적을 그대로 보여주면서 너의 궤적을 그려내는 것이다. 그 속에는 모두의 불안과 의구심이 사라지고 자웅동체의 자유로운 영혼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최승호 시인은 오징어에서 "그 오징어 부부는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부둥켜안고 서로 목을 조르는 습성이 있다"고 했다. 하물며 부부지간에도 갈등과 연민의 비애가 숨어 있듯이 남과 남 사이에는 알지 못하는 의구심은 떨쳐 버리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너와 내가 물 흐르듯이, 내 결심이 너에게로 번져서 간다면 이러한 의구심은 단번에 해소될 것이다.

사람들의 생각과 말은 개인주의 함성에 길들여져 있다. 그러다 보니 사람에게로 물꼬를 터는 것도 일정의 속도가 생기게 되는 것이며, 그에 따라서 어두운 빛의 감염도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이는 말없이 흘러드는 물의 목소리를 얻지 못해서이다. 물에는 물의 소리가 있다. 물은 흘러드는 데로 서로의 소리를 만들면서 간다. 강물은 강물의 소리로, 냇물은 냇물의 소리로 서로 뭉쳐서 간다. 그리하여 끝까지 가는 것이다. 사람도 이와 같아서 함께 가는 길에 소리 없는 물꼬를 내어 유려하게 흘러야 하는 것이다.

물과 물이 섞이는 곳,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곳에는 항상 소용돌이가 생기기 마련인 것이다. 이것이 서로가 서로를 만나고 이해하는 방식이다. 이 우람한 소용돌이가 섞이고 섞여서 새로운 물꼬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가보지 못한 곳으로 흘러 가보는 것이다. 스며들고 젖어서 끝까지 가보는 것이다. 바람이 지나고 태양이 지나는 그곳으로 푸른 꿈을 꾸면서 너와 내가 함께 가는 것이다.

어둠이 터진 밤마다 달은 내려선다. 들판이 은회색으로 물든다. 어둠이 번져서 달의 길이 되었다. 달의 길이 번져서 밤의 길이 되었다. 나는 너에게로 가는 물꼬를 낸다. 너의 사랑이 흘러든다. 너에게서 내가 흐르고, 나에게서 네가 흐른다. 사람과 사람사이, 들판과 들판사이, 푸르게 일어서는 이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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