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김해박물관의 로고를 눈여겨 본 사람은 오리문양을 기억할 것이다. 오리 두 마리가 물 위에 한가로이 떠 있는 모습을 상상했을지도 모른다. 박물관 홈페이지의 메인 페이지를 장식하는 것도 오리형태 토기이다. 국립김해박물관을 장식하는 대표적인 상징물로 왜 오리가 등장하는 것일까. 가야의 역사와 문화를 담은 김해에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가야의 문양에는 오리 말고 또 어떤 것이 있을까.

▲ 국립김해박물관 앞 거리에는 파문, 칠주령문, 쌍어문 등 가야의 문양을 볼 수 있는 보도블럭이 있다.

무늬(문양)은 물건의 겉에 어룽져 나타난 어떤 모양을 말한다.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도 있고, 인위적으로 만들어질 수도 있다. 인위적으로 무늬를 만들어낸 최초의 예술인이 누구인지, 무슨 의미로 그런 무늬를 만들어낸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가야의 문양은 토기를 비롯한 여러 유물에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해와 달, 동물과 식물 등 모티브, 자연숭배 고대인 예술행위 결과물

국립김해박물관 박중환 학예실장은 "해 달 별 구름 파도 등의 자연물, 새 오리 사슴 같은 동물, 꽃 풀 나무 같은 식물, 그 모든 자연에서 모티브를 따 와 단순화하는 과정에서 무늬가 되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갔다가 큰 파도에 두려움을 느낀 사람이 평온한 바닷길을 염원하며 토기에 파도무늬를 넣은 것이 '파상문(물결무늬)'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고대인들은 영원한 생명과 에너지를 가진 태양을 본떠 원을 그렸을 것이다. 구름 모양을 본뜬 성운문, 번개 모양을 본뜬 뇌문, 식물과 동물을 본뜬 무늬 등 많은 문양이 자연에서 왔다. 자연의 형상이 단순화되는 과정에서 자연에서 볼 수 없는 기하학적인 문양도 생겨났다.
 
토기를 만들 때 흙이 품고 있는 공기를 빼내고 단단하게 만드는 과정에서도 무늬는 태어났다. 작은 방망이로 토기 표면을 두드릴 때 토기에 닿은 면에 무늬가 새겨졌다. 선을 촘촘히 그은 집선문이 새겨진 방망이로 두드리면 무늬가 그대로 새겨졌고, 교차해 두드리면 격자무늬도 만들어졌다. 토기가 멍석에 닿으면 꼬아진 새끼줄이 자연스럽게 삿자리문을 만들기도 했다. 구슬을 촘촘히 박은 방망이로 두드리면 점열문이 만들어졌다.
 
▲ (위)오리문양을 상징으로 하는 국립김해박물관의 로고. (아래)반원점열문을 본뜬 대성동고분박물관 로고.
"그 문양들은 고대 사람들의 예술행위입니다"라고 박 실장은 말한다. 밋밋한 사물에 무늬를 넣는 첫 번째 목적은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칼이나 갑옷에 새겨진 문양은 그 물건을 가진 사람의 위엄을 나타내었을 터. 제의와 무덤의 부장품에 사용되었던 물건들의 무늬에는 사람들의 염원을 표현하는 제의적인 목적도 있었다.

가야 대표 상징물 오리 문양
탄생과 영혼 이끈 매개자 상징
파상문·성운문·반월점열문 등 다양

우리나라에서, 아니 전세계에서 가야의 유물이 가장 많이 보관되어 있는 국립김해박물관의 상징인 오리문양에는 가야인의 마음이 담겨 있다. 2008년 9월 발간된 '국립김해박물관 도록'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변조의 기록으로 보아 당시 사람들은 새가 죽은 사람의 영혼을 저승으로 안내한다는 믿음을 가졌던 것으로 해석된다. 고대국가의 건국 설화에서도 새(알)의 상징적 의미를 엿볼 수 있다. 새로운 탄생의 기원과 죽은 이의 영혼을 이끄는 매개자로서 새를 신성시 하였음을 보여 준다. 낙동강을 생활 기반으로 하는 변한 사람들에게 해마다 찾아오는 철새는 친숙하면서도 인간에게 신보다 좀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존재였다."
 
낙동강을 중심으로 동서쪽에 폭 넓게 자리한 가야문명에서 오리모양토기가 많이 발견되는 까닭이 짐작된다. 오리를 본떠 만든 문양은 갑옷이나 미늘쇠 등에서도 볼 수 있다.
 
대성동고분박물관의 로고는 얼핏 보기에 현대적인 문양 같지만, 가야토기에서 볼 수 있는 '반월점열문'을 바탕으로 만들었다. 대성동에서 발굴된 '화로모양토기'에는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반원과 점을 그린 '반원점열문'이 새겨져 있다. 삼각형 속에 직선을 채워 넣은 '삼각집선문'도 잘 나타나 있다.
 
▲ 김해 대성동에서 출토된 '목항아리·그릇받침'은 가야의 다양한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다.
역시 대성동에서 발굴된 '목항아리·그릇받침'에는 위의 두 무늬 외에도 원, 직선 등이 새겨져 있는데, 자세히 볼수록 공이 많이 들어간 고대인의 손길이 느껴진다. 그 정성스러운 손길로 보아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식품공헌기로 짐작된다. "이런 고대인들의 작품을 오늘에 재현하는 것이 더 힘듭니다"라는 것이 박 실장의 설명이다. '화로모양토기'와 비교해 보면 무늬가 더 수준 높게 표현된 것을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보아도 알 수 있다.
 
"고대 사람들에게 자연은 외경의 대상이며 공경을 바쳐야 하는 대상이었습니다. 아름다움과 삶, 그리고 신앙심으로 자연을 깊이 받아들이고, 감동하고, 예술로 재현했을 겁니다." 박 실장의 설명을 들으며 박물관의 유물들에서 가야의 문양들을 하나하나 찾아보는 시간은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그게 그것 같던 토기들은 조금씩 다른 무늬를 새기고 있었고, 무기와 갑옷은 저마다 가야인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었다. 박물관은 더 이상 박제된 공간이 아니라, 수 천 년 전 가야인의 손길을 전해 주는 세월을 뛰어넘는 공간이었다.
 
박물관 관람객 정만수(53·부산 수영) 씨는 "경전철을 타고 와서 연지공원 들렀다가 박물관에 왔습니다. 옛날 책에서 공부하던 가야의 문화를 접할 기회가 없었는데, 출토된 유물을 보니 뛰어난 문화를 가진 국가였다는 사실이 실감납니다"라며 감탄했다.
 
전시실을 둘러보고 국립김해박물관을 나서는데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기념품 가게에서는 '불꽃무늬 굽다리접시' 책갈피를 만났다. 그 전에는 미처 보이지 않던 작은 기념품이었다.
 
정문을 나서면서는 박물관의 도로면 철제 담장을 장식하고 있는 쌍어문도 눈에 띄었다. 수로왕릉에서 보았던 쌍어문은, 구지봉과 허왕후릉을 잇는 터널 입구를 장식하고 박물관 담장도 장식하고 있었다. 인도의 보도블럭을 따라 걷는 길은 더 재미있었다. 가야인들이 위세를 나타내기 위해 방패에 장식했던 소용돌이나 회오리바람 같은 파문, 신을 부르는 제의로 사용했던 칠주령 형상의 무늬, 고사리문, 쌍어문을 응용한 보도블럭이 여러 곳에 박혀 있었다. 수로왕릉 옆 김해합성초등학교 건물에도 오리문양을 비롯한 가야의 문양들이 그려져 있었다. 알게 모르게 가야의 문양들이 우리 곁에 스며들어 있었던 것이다.
 
2002년 월드컵 당시 많은 젊은이들이 태극기를 흔들어대다, 아예 태극기를 응용한 패션으로 거리를 물들였던 기억이 난다. 그 재기 넘치는 발랄함이 태극기를 얼마나 친숙하고 가깝게 했던가. 고대 가야의 문양도 김해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다시 피어났으면 하고 기대해 본다. 

Tip 불꽃무늬 굽다리접시 책갈피 - 4세기 후반 아라가야인들 장례 때 사용한 그릇 형상화
국립김해박물관의 많은 기념품 중에서 가야의 문양을 볼 수 있는 기념품. 높이 16.0㎝의 '불꽃무늬 굽다리접시'는 사적 제84호 경남 함안군 가야읍 도항리 24호분(가야시대)에서 출토되었다. 현재 국립김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토기는 4세기 후반 아라가야인들이 장례 때 사용한 다리가 붙은 그릇 형태이다. 굽다리에 불꽃 모양을 단순화한 무늬의 구멍을 뚫었다. '불꽃무늬 투창'은 4세기에서 5세기까지 아라가야를 상징한 대표적인 무늬였다. 굽다리 접시 모양으로 만든 책갈피 가격은 2천5백 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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