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심 수필가

"저 어린것이 조막만 한 손으로 돈 벌러 다닌다네."

아버지는 마실 온 동네 사람들을 앞에 두고 안쓰러운 얼굴로 나를 보며 말씀하셨다. 그때 내 나이가 서른아홉이었다. 잠깐 다니러 간 고향 집에서 그 말을 들은 나는 무척이나 부끄러웠다. 물론 내가 덩치도, 키도 작지만 그렇다고 '저 어린것' 이란 소릴 듣기엔 어림없는 나이었다. 아버지에게 막내딸은 나이가 많건 적건 그저 저 어린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얼마 전, 포털 게시판에 글이 하나 올라왔다. 내가 살다 살다 예비군을 태워다 줄지는 몰랐다는 내용의 글이다. 그 밑에 줄줄이 달린 댓글에는 '제대를 해도 아이는 아이다.' '나는 민방위도 태워준다.'는 글들도 있었다. 어느 어머니는 친구 집 잘 찾아갔냐는 전화를 딸에게 했다는데 그 딸이 오십이 넘었단다.

나 역시 예외가 아니다. 큰아이는 성인이 된 지 오 년이 지났고, 둘째 아이는 주민증도 발급받은 고등학생이다. 내 눈엔 뭐든지 안쓰럽고, 안타깝고, 못 미더운 물가에 내놓은 아이 같이 보인다. 비가 오면 비를 맞을까 걱정이고, 버스시간 맞춰서 뛰어가면 무사히 버스를 탔을까 걱정이다. 아예 비가 많이 내리는 아침이면 작은아이 고등학교와 큰아이 대학원 입구까지 태워다 줘야 맘이 편해진다. 헬리콥터 맘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었다. *(헬리콥터처럼 자녀의 주위를 맴돌며 챙겨주는 엄마를 지칭하는 말.)

아이들이 대학을 졸업하고도 입사시험 면접을 가면 요즘 면접관들을 취업 준비생들에게 물어본다고 한다. 무얼 타고 어떻게 여기까지 왔냐고. 그러면 눈치 없는 아이들은 부모님이 태워다 줬다고 말한다. 면접관 눈에 자립심 없는 사람을 뽑고 싶겠는가? 그 아이들은 부모님들 때문에 취직이 더 힘들게 되어갈 뿐이다.

내 딸아이를 생각해보니 믿음직한 면도 있지만, 아직 나에겐 아이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는 딸과 같은 나이에 저를 낳아 키운 엄마였다. 뭘 알았을까? 아무것도 모를 것 같은 여릿한 외모에 어떻게 아이를 낳고 키웠을까? 내가 성인이 되었을 때도 엄마는 나에게 말하곤 했다. "너를 가르쳐 시집보내느니 내가 한 번 더 가는 게 낫겠다. 아니 내가 따라가서 다 해주고 말겠다"라고…….

어쩌자고 나이만 먹고 부모 마음에 듬직하지 못한 사람이 되었는가. 이제는 나를 안쓰러워해 주고 마음 졸이며 걱정해줄 부모님도 모두 떠나셨다. 세월은 대를 이어 부모님이 나에게 했던 것처럼 내가 아이들에게 노심초사하게 생겼다. 자식은 태어나서 서너 살까지 모든 효도를 다 한다는 말이 있다. 함박웃음과 재롱을 본 죄로 평생을 자식 걱정을 하며 살아야 하는 부모 입장이다.

성인이 되어 졸업해도 취직이 잘될까 걱정이다. 그것이 이루어져도 사회생활은 무난하게 할까? 마음 다치지는 않을까 걱정스럽고, 험한 세상 잘 헤쳐 나갈지 늘 애가 쓰인다. 차라리 내가 아프고 내가 고통 받고 말지 아이가 아프고 고통스러운 것은 볼 수 없는 것이 부모 마음이다. 누구에게나 내가 낳은 아이는 어른이 되어도 아이일 뿐이다. 태산 같은 걱정을 이고 지고 세월을 견뎌내는 부모의 마음을 알 수 있는 것은 나도 그만큼 인생의 무게를 견디고 있다는 것이다. 세월은 그렇게 또 한 바퀴를 굴리고 있다. 김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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