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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예술의 교차로시론
  • 수정 2019.07.17 09:12
  • 게재 2019.07.17 09:06
  • 호수 431
  • 11면
  • 김용권 시인(report@gimhaenews.co.kr)
▲ 김용권 시인

출근길에 교차로에 선다. 무수한 사물이 끌려왔다 끌려간다. 붉고 푸른 눈들이 서로를 보고 있다. 낯선 얼굴이지만 어디서 본 듯도 하다. 초초하게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린다. 신호등에는 시끄러운 침묵이 걸려있다. 출근길에 몇 년을 보아도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변하는 것은 어디로든 흘러간다. 흘러가지 않는 바닥에 박힌 살대뿐이다.

붉은 비명과 푸른 소음이 뒤섞이는 교차로에는 나를 당기는 화살이 걸려있다. 그곳은 나의 사선이었다. 사선에서는 어디론가 날아가서 과녁에 박혀야 한다. 그 많던 과녁은 어디로 갔는가? 나는 너무 멀리 날아가기도 하고, 유턴을 거쳐 되돌아오기도 한다. 어제와 오늘은 좁혀지지 않는다. 비극과 희극사이다. 이른 아침 나란히 선 옆의 화물차 짐칸에는 붉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소가 실려 간다. 고개를 넘어가는 소들은 서로를 핥으며 위로하고 있다.

동물만큼 죽음을 직감하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눈이 선한 짐승들은 더욱 그렇다. 그 큰 눈에는 마지막 세상을 다 담아 가려는 듯 껌벅거리면서 나를 보고 있다.. 지구가 눈을 감았다 뜨는 아침, 슬픔의 감상도 잠시 신호가 바뀌면 나는 어디론가 날아간다. 날아가서 박힌다. 살대의 끝은 예리하다. 그러나 과녁 앞에서는 휘어진다. 돌아갈 수 없다. 한참을 날아가면 어느덧 별을 삼키는 저녁이다.

그녀는 너무 멀리 왔다. 바닥에 피가 고이고 아스팔트는 성스럽게 그 피를 받아내고 있다. 멀리 구급차 사이렌 소리가 비명을 닦고 있다. 바퀴의 제단에 부려진 피를 본 목격자들은 저마다의 경의를 표하고 물러선다. 이것은 흔히 보는 교차로의 성격이다. 너무 자주 보아서 모두가 무감각 해지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바닥에는 하얀 페인트가 오늘, 그 사건을 기록하는 의식을 막 끝내면, 멀뚱히 사람들은 신호등만 원망하고 간다. 그것을 바라보는 시간은 1분 30초, 애인의 변심 시간은 너무 짧다.

신호등이 바뀌는 방식은 고정식과 감응식이 있다. 보통 고정식은 90초에서 180초에 바뀐다고 한다. 이것이 신호등 앞에서 너를 생각하는 시간이다. 사다리 같이 줄그어진 횡단보도를 따라 가면 도로의 생각으로 횡단하는 것이다. 비틀즈의 멤버들이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찍은 사진을 생각 하면서 교차로를 건넌 적이 있다. 교차로에는 경쾌한 음악이 있다. 바퀴들은 소리를 내며 구르기 시작했고 불안한 사람들은 또 다른 성운을 향해 걸어갔다.

교차로에는 너와 내가 서있다. 너는 건너오고 나는 건너간다. 다만 그것이 나를 통제하고 있는 시스템에 숙달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성실한 수강생처럼 고분고분 따른다. 비극을 생각하는 순간을 날려버리는 것이다. 인간을 통계와 통제의 수단으로 관리하는 체계의 권력 앞에서 무감각을 집요하게 요구 하고 있다. 그러면 사회는 경제적 생존을 위해 상호 의존과 투쟁의 자리는 서로 변질되고 무뎌지는 것이다. 나는 교차로에서 통제 받고 있다.

교차로라 하면 무엇과 무엇이 만나는 지점이면서 헤어지는 지점이다. 애플의 공동창업주 스티브 잡스는 모든 생각이 예술과 과학의 교차로라는 생각을 하였다. 무조건 건너는 교차로가 아닌, 생각의 전환점을 이루고 만나는 곳이 교차로라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도로의 교차로와 정신적 발상의 교차로와는 다른 성격이지만 교차로라는 큰 의미에서는 일맥상통한 부분도 있을 것이다.

이 도시는 여러 겹 생각들이 층층이 모여서 질서 잡힌 내용들과, 정밀한 구조의 형식들을 모아서 규범을 만들어내고 있다. 붉은 신호등이 켜지고 녹색등이 켜지면 우르르 몰려가는 사물들이다. 오늘의 사망자가 전광판에 숫자로 떠올라도 사람들은 무신경하다. 그냥 보는 것이다. 동물처럼 죽음을 예감 한다면 선뜻 알아차리겠지만, 나만 아니면 무슨 대수라 싶어서 그냥 지나간다. 설령 그것이 나의 일이라 해도 대처가 불가능하기에 무른 척 하는 것이다.

이제 나는 교차로를 건너간다. 비명과 소음을 삼키는 곳임을 인식한다. 어제와 오늘의 비극과 희극이 공존하는 곳에서 껌벅이는 짐승의 눈을 달고 간다. 예술과 과학의 교차로에 선다는 것은 오늘의 가장 날렵하게 날아가는 방식, 내일 아침 식탁으로 오른 소의 눈을 보면서 푸른 나이프를 들고 경배의 술잔을 올릴 것이다. 이것이 통제와 통계의 수치를 벗어나고 권력에 대항하는 나의 자세인 것이다. 푸른 신호등이 들어오고 있다. 김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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