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동 아지매대구탕. 제철인 대구탕뿐만 아니라 분청색 사기그릇에 담겨 나오는 일곱가지 밑반찬에서도 주인장의 정성 깃든 맛이 먼저 눈으로 느껴진다. 사진/박정훈 객원기자 punglyu@hanmail.net

음식을 먹으면서 '추억을 먹는다'는 표현을 자주 쓴다. 추억이 아름다운 것은 다시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다. 먹을거리가 넘쳐나는 세상이니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음식을 먹을 수는 있지만 그 상황까지 고스란히 재현할 수 없기에 애잔한 것이다. 돌이킬 수는 없지만 되새김질은 하고 싶은 욕망이 낳은 결과가 '추억의 음식'이다.먹는 것에 집착이 강한 사람에게는 추억을 넘어 '환상의 음식'이 있기 마련이다. 대구라는 생선은 12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가 제철이다. 그러니 이 계절에 큼지막한 생대구로 끓인 대구탕 한그릇은 반드시 먹어야 직성이 풀린다.

하지만 정작 시원한 국물과 보드라운 대구살을 먹고 있노라면, 대구탕은 뒷전이고 '환상의 음식' 두 가지가 떠오른다. 지금은 은퇴를 하신 아버지는 수십년 간 금융권에 재직하셨다. 거액의 대출을 위해서는 리베이트가 다반사였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아버지는 돈은 사절하는 대신 술과 음식, 이른바 향응을 선택했다. 먹어 조지는 바람에 집안 형편은 팍팍했지만 아버지의 무용담(?)을 듣는 것만으로도 배가 불렀다. 지금 이렇게 음식 관련 글을 쓰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집안 내력인지도 모르겠다. 아버지가 들려 주셨던 수 많은 무용담 중에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이 말린 '가덕대구'였다.
 
거제도 장목면과 부산 가덕도로 둘러싸인 진해만은 1960~1970년대 세계적인 대구 산란장이자, 어장이었다. 회유성 어종인 대구는 진해만에서 부화한 뒤 동해를 거쳐 오호츠크해 일대를 돌며 성장해 다시 진해만으로 돌아와 알을 낳았다. 그 시기가 바로 12월에서 2월 사이다. 진해만에서 잡힌 대구는 거제도 왜포항과 진해 용원항으로 주로 모였다. 그래서 거제도 쪽에서는 '거제대구', 부산 쪽에서는 '가덕대구'라 불렀다.
 
진해만의 대구가 씨가 마른 적이 있다. 한해 위판량이 고작해야 몇십 마리 정도에 불과하다 보니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아 '金대구'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크기에 따라 마리당 수십만원에서 백만원까지 호가하던 시절이었다. 이때 아버지는 가덕대구를 꾸덕꾸덕 말린 대구포를 술안주로 즐겼다. 살캉살캉 씹히는 대구포를 초장에 찍어 먹는 그 맛이 일품이라 하셨다. 돈을 싸들고서라도 대출을 받아야 하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로서는 어떻게든 구해다 바쳐야 했을 것이다. 어린 마음에 대구포가 세상에서 가장 귀한 술안주라는 환상이 자리잡았다.
 
1986년부터 진해만의 대구를 살리기 위해 인공 수정란 방류 사업을 벌였다. 꼬박 20년이 걸렸다. 2003년 한햇동안 거제수협 각 위판장에서 거래된 대구가 모두 9천여 마리에 불과했으나, 2004년에는 11월~12월 한 달 반 동안 위판량만 무려 3만 2천여 마리로 늘었고 이후로 꾸준히 상승 추세에 있다. 이때부터 나도 그 '환상의 음식'을 입에 댈 수 있었다. 아버지가 즐겼던 그 술안주가 '약대구'란 사실도 그제서야 알았다. 약대구란 알이 든 놈을 입을 통해 아가미와 내장을 제거하고, 배 속에 한약재와 진간장을 붓고 약 한 달간 말린 것이다. 귀한 대구로 만든 귀한 음식이니 여지껏 손에 꼽을 정도로 먹어 봤고, 그래서 여전히 환상의 음식이다.
 

또 하나는 매우 그로테스크하면서도 하늘이 점지해주지 않으면 먹을 수 없는 음식이다. 고등학생 때부터 요리를 시작해 23년째 한 길을 걷고 있는 친구가 있다. 음식에 대한 집념과 호기심 하나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요리사다. 몇 해 전 이 친구가 태어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먹는 음식일 것이라 장담하며 작은 종지 하나를 내밀었다. 새우젓이었다. 손톱만한 새우 하나를 입에 넣었는데 바다가 통째로 들어왔다. 그 작은 몸에 어쩌면 이리도 강렬한 것이 농축되어 있는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 음식의 정체를 알고는 더한 충격을 받았다.
 
대구는 말 그대로 입이 커서 대구(大口)다. 입이 큰 만큼 먹성도 좋다. 청어, 명태, 가자미, 오징어, 새우 등을 닥치는 대로 먹어 치운다. 씹지도 않고 꿀꺽꿀꺽 삼켜버린다. 그래서 새우 떼를 좇다보면 간혹 그물에 대구가 걸린다고 한다. 이때 잡힌 대구의 위장에는 어린 새우가 가득하다. 씹지도 않고 삼켰으니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경험적으로 이를 터득한 어부들은 그 위장만 들어내 소금을 넣고 입구를 단단히 봉해 며칠간 삭혔다고 한다. 이를 전해들은 요리사 친구는 하루가 멀다하고 어부를 찾아가 위장에 새우가 가득 든 대구 한 마리를 구해왔다고 한다. 내가 먹었던 새우젓은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어부들조차 어쩌다 만나는 물건이니 뭍사람이야 오죽할까. 진짜로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런 기억이 한 켠에 똬리를 틀고 있으니 그 시원하고 보드라운 생대구탕이 성에 찰 리가 없다. 그렇다고 허구헌날 추억과 환상만 먹고 살 수는 없는 노릇. 추억과 환상은 손에 쉬 잡히지 않는 아스라함이 있어야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는 법이다.
 
환상을 접고 현실로 회귀해도 대구는 여전히 기특한 생선이다. 몸통부터 아가미까지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다. 알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정액 덩어리(흔히 '곤'이라고 하지만 '이리'가 바른 말이다)까지 별미로 친다. 대구회, 대구매운탕, 대구지리, 대구껍질채, 대구조림, 대구포무침, 대구아가미젓, 대구이리구이 등 조리법 또한 다양하다. 그중에서 맑게 끓인 대구지리(대구탕)가 가장 대중적이다. 복국과 더불어 해장국의 양대 산맥을 이룬다. 하지만 복국이건 대구탕이건 사시사철 즐기기 위해선 한 가지 인정해야 할 사실이 있다. 대부분이 냉동이라는 점이다. 생복이나 생대구로 끓인 국과 냉동으로 끓인 것은 가격에서도 큰 차이가 난다. 그렇다고 속단할 일은 못된다. 생대구 만큼은 아니겠지만 냉동 대구 역시 잘만 끓이면 여느 재료보다 나은 맛을 낸다.
 
영화 '해운대'의 무대가 됐던, 부산 해운대해수욕장의 끝자락 미포 주변에는 대구탕전문점 너댓 곳이 몰려있다. 냉동 대구를 사용해 술꾼들을 상대로 속풀이로 끓여 내던 것이 어느덧 전국적인 명물이 되었다. 최근에는 일본인 관광객들의 입맛까지 사로잡고 있다. 이제는 횟집이나 복국집을 제치고 해운대를 가면 반드시 먹어야 될 음식이 되었다.
 
이집이건 저집이건 자기네가 최고라 자부하고 고객들의 평가 역시 호불호가 갈리지만, 이 지역 토박이들은 '아저씨대구탕'을 으뜸으로 꼽는다. 호텔 접시닦이부터 시작해 일식조리사가 된 아저씨가 수십년 세월을 돌아 결국엔 작은 대구탕집을 차렸다. 사업도 망하고 아내도 먼저 떠나 보냈지만 자식들 거두겠다며 시작한 일이다. 모진 세월을 거쳐 온 아저씨가 국솥에 꼼짝 않고 붙어 서서 잡아내는 타이밍이다 보니 그 국맛이 탁월할 수밖에 없다. 몇 해 전 아저씨는 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단골이던 아주머니가 가게를 이어 받았지만, 가게 이름은 여전히 '아저씨대구탕'이고 단골들은 변함없이 문턱을 넘는다. 아저씨 때 만큼 국맛이 안정적이지는 않지만 명불허전이란 말이 손색 없을 수준은 된다. 그러고 보면 이집 대구탕 역시 '추억의 음식'인 셈이다.
 
아쉽게도 김해는 추어탕·메기탕·오리탕 등 김해평야와 낙동강이 낳은 '탕'이 워낙 강세다 보니 복국과 대구탕 등 바다생선으로 끓인 국이 상대적으로 약하다. 인적·물적교류가 활발해 지역성이 옅어졌다고는 해도, 전통과 습관은 그리 쉽게 사리지지 않는 법이다.
 
그러던 차에 김해시 외동의 '아지매대구탕'을 발견했다. 맛을 보기 전에 상호에 우선 끌렸다. '아저씨대구탕'과 '아지매대구탕', 대구탕집 이름 치고 이 얼마나 기막힌 '대구(對句)'인가 싶어 얼른 달려갔다.
 
아구찜, 대구뽈찜, 동태탕, 아구탕, 대구탕, 오리구이, 닭백숙, 돼지고기두루치기 등 메뉴가 번잡스럽다. 이름은 전문점인데 구색은 고만고만한 식당이다. 후회하기엔 이미 늦었으니 일단 먹기로 한다. 일곱 가지 반찬과 밥이 먼저 깔리는데 죄다 분청색 사기그릇이다. 밥그릇에는 뚜껑까지 덮여 있다. 그릇에 이정도 신경쓰는 식당이라면 믿을만 하겠다 싶다. 아닌 게 아니라 촉촉하니 때깔이 선명한 반찬은 손맛까지 더해져 맛깔스럽다.
 
큼지막한 양푼이에 토막낸 대구와 무, 콩나물, 미나리가 전부다. 자고로 맑은 대구탕은 이것으로 충분하다. 냉동 대구로 국을 끓일 땐 거품을 잘 걷어내야 한다. 이것만 잘 지켜도 국맛이 훨씬 맑아진다. 한소끔 끓인 다음 국맛을 보니 시원하고 깊은 맛이 제법이다. '아저씨대구탕'에 비해 육수와 양념이 조금 진한 느낌이 들지만, 뭐 어떠랴! 이것도 김해 아지매의 개성이라 생각하면 그만이다. 오히려 김해에서 이정도 대구탕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반가움이 더 크다.
 
▲ 아지매대구탕집의 또하나의 별미 동태탕.

대구는 대식가답게 입이 크고 머리통도 큼지막 해서 '대두어(大頭魚)'라고 불린다. 그래서 볼때기의 살점이 두툼하다. 이를 대구뽈이라 한다. 대구를 즐겨 먹는 캐나다, 아일랜드 등지에서는 머리를 잘라 버린다지만 한국인은 오히려 이를 귀하게 여긴다. 구석구석 박혀 있는 살을 발라 먹는 재미가 쏠쏠하고, 특히 보드라운 입술은 남주기 아까운 별미다. '아지매대구탕'에서는 이 대구뽈만 사용해 국을 끓인다. 처음 국자로 휘휘 저으면 살점이 보이지 않아 실망하지만 일단 볼때기를 공략하기 시작하면 한동안 정적이 흐른다.
 
지리가 시원해 매운탕은 어떨까 싶어 내친 김에 동태탕까지 시켰다. 같은 재료 같은 육수를 썼음에도 국맛이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대구탕은 진하지만 동태탕은 오히려 담백하다. 대신 매운 양념을 곁들여 칼칼하니 절로 술을 부른다. 대구탕은 해장으로 동태탕은 술안주로 제격이다. 음식 맛을 보아하니 아구찜과 뽈찜도 기대를 할만하다. 저녁에는 술을 마시러, 점심에는 해장하러 두루두루 들러 볼만한 집이다.

▶메뉴:대구탕(7천원), 동태탕(6천원)
▶위치:김해시 외동 1242-3
▶연락처:055)327-9005





박상현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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