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혜경 가야문화예술진흥회 편집장

재작년, 다우들과 나뭇잎을 다 떨군 가로수가 오스스 떠는 계절에 목공방을 찾았다. 따끈한 차와 새로운 작품을 감상하기에 좋은 곳이다.

고재 다탁에 눈길이 모였다. 오랜 세월이 만들어낸 묵직한 목재 결이 탐났지만, 다탁 끄트머리에 붙여진 만만치 않은 가격에 고향 빈집 대문이라도 떼어 와서 다탁을 만들어봐야겠다는 농담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진열장 앞을 서성거리다가 오도카니 앉아있는 그릇이 눈에 띄었다. 명판에 적힌 이름이 '보듬이'다. 두 손 가득 잡힐 크기로 구 윗부분이 조금 잘린 듯하다. 찻잔이라 하기에는 크고 그릇이라 하기에는 작고 깊다. 입이 벌어지는 찻사발과는 달리 입언저리가 오목하다.

미색에 황토색이 연하게 깔려있어 소박하지만 식은태가 예사롭지 않다. 표면에는 우둘투둘한 숨구멍이 분화구처럼 드문드문 나 있어 거칠거칠하다. 거친 촉감이 두 손으로 잡을 때 안정감을 준다.
그동안 손길을 얼마나 탔던지 숨구멍엔 때가 꺼뭇꺼뭇하다. 때가 끼었지만 사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았다. 지갑에 있는 현금을 다 꺼내도 모자라서 곁에 있던 다우 돈을 보태고서야 포장된 '보듬이'를 안고 왔다.

내 방 책상 앞에 앉으면 진열장에 놓인 보듬이가 마주 보인다. 보듬이 얼굴엔 터진 듯 벌어져 있는 부분이 있는데 웃는 아이 입 같다. 어찌 보면 보름달보다 여백이 있는 상현달을 닮았다. 보이는 대로 생각하는 것이 감상이 아닌가. 나는 터진 갈색 부분을 보듬이의 입이라고 여겼다.

우연한 기회에 보듬이 전시회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부터 한달음에 달려갔다. 작가마다 독특한 색감과 모양을 지닌 보듬이를 감상하는 동안 내내 두고 온 보듬이 용도를 떠올렸다. 전시회를 둘러보고 나니 당번을 선 작가가 보듬이로 차를 내어왔다. 보듬이는 장식품이 아니라 차를 담는 그릇이었다.

모든 보듬이는 굽이 없다. 그릇에 굽이 없으니 불가피하게 바닥을 동그랗게 홈을 팠다. 굽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몸체 일부를 깎아내렸다. '보듬이' 이름에는 가장 낮게 '겸손한 자세로 보듬어 안는다'라는 작가의 뜻이 담겨있다.

보듬이로 차를 마시려면 반드시 두 손으로 잡아야 한다. 두 손으로 그릇을 받쳐 들어 한 방울의 찻물까지 마시다 보면 저절로 겸손해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보듬이 몸체를 자세히 살펴보면 눌린 타원형 흔적이 있는데 둥근 모양을 내려면 처음에 잡은 손을 움직일 수 없어서 생긴 모양이라고 한다. 보듬이는 손가락이 저리는 고통을 참는 도자공의 진중하고 겸손한 마음이 담겨있다.

안기는 보듬이의 온기가 나의 두 손을 데우더니 온몸으로 전해져온다. 안기는 이보다 품을 내어주는 이가 한결 행복해지는 겸허한 이치를 배운다.   김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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