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부랑 할머니 이야기에 깃든 유전자
한국인의 집단 기억과 문화적 원형
목차도 이야기처럼 '12가지 고개' 구성
나이 계산·포대기 육아 등 서양과 비교
올해 '알파고와 함께 춤을' 등 3권 추가



"1965년 독일 아헨 공대에서 개최된 연주회에서 한국 출신의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이 갑자기 바지를 내린 후 자신의 엉덩이를 관객에게 보여줬다. 당시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공연과 전시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그였지만, 정작 그가 관객에게 보여주려고 한 것은 엉덩이 자체가 아니라 몽골로이드계 인종의 특징인 '몽고반점'이었다."
 
2019년 2월 10일 <사이언스 타임> 인터넷판에는 '몽고반점의 미스터리 한국인 신생아 97%에서 관찰돼'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기사에는 '변방의 아시아인으로서 주류 구미 예술계에 뛰어든 백남준이 유럽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대제국을 이루었던 몽골처럼 전 세계를 아우르는 예술을 추구하고 싶었던 행동'이란 해설이 달려 있었다.
 
이어령 박사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몽고반점이 삼신할머니 때문에 생긴 멍 자국임을 강조하며 "백남준이 정말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몽골 대제국이 아니라 제국을 낳은 자궁인 몽골초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백남준이 자신의 엉덩이에 난 몽고반점을 통해 모태가 남긴 퍼런 생명 지도가 무한히 확대되는 환상을 봤으며 몽고반점이 어떻게 지워지는지도 알았을 것으로 상상한다. 이어령은 백남준이 자신에게 선물로 준 달걀 모양의 대리석 돌멩이를 떠올린다. 백남준은 그 대리석에 금세 날아가는 수성펜으로 그림을 그렸다. 백남준의 예술작품과 행위들은 마치 몽고반점처럼 지워지는 것의 아름다움 속에 생명을 담았다.
 
이 내용은 한국을 대표하는 석학으로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낸 이어령 박사가 펴낸 <한국인 이야기-탄생>(파람북)의 '삼신고개' 편에 나온다. 이 책은 '한국인 이야기' 시리즈의 1권이다. 시리즈 2권 <알파고와 함께 춤을>, 3권 <젓가락의 문화 유전자>, 4권 <회색의 교실>도 올해 출간된다. 시리즈 출간은 계속될 예정이다.
 

책은 혹독한 산고 끝에 탄생했다. 저자는 2009년부터 책을 계획했지만 10년 동안 무리한 집필로 머리 수술, 암 수술 등을 받아야 했다. 이 박사가 희수(喜壽·77세)에 책을 잉태해 미수(米壽·88세)에 출간했으니 10년이 넘게 걸린 셈이다.
 
저자는 채집 시대부터 이어져 온 한국인의 문화 유전자를 분석하며 우리가 생명화 시대의 주역임을 일깨운다. 한국인의 몸에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듣기 힘든 꼬부랑 할머니 이야기의 유전자가 있다고 강조한다. 밑도 끝도 없이 이어지던 그 이야기들 속에 한국인의 집단 기억과 문화적 원형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책의 목차도 '꼬부랑 할머니'의 동요처럼 12가지 고개로 구성했다. '태명 고개'를 시작으로 '배내 고개' '출산 고개' '삼신 고개' '기저귀 고개' '어부바 고개' '옹알이 고개' '돌잡이 고개' '세 살 고개' '나들이 고개' '호미 고개' '이야기 고개' 등으로 이어진다.
 
저자는 생명 자본의 시대를 열어가는 한국인의 이야기를 켜켜이 채집하고 드러낸다. 우리와 서양의 탄생 문화를 비교한 대목들이 흥미롭다.
 
아이의 나이를 셀 때 서양에서는 엄마 배 속에 있는 시간은 치지 않는다. 인간이 만든 문화와 문명이 아이를 키운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엄마 배 속에 있을 때 이미 한 살이다. 태아는 자신이 알아서 태반을 만들고, 호르몬을 분비하고, 필터로 걸러내고, 배 속에서 나갈 때를 결정한다. 태아에게는 태생기의 거대한 생명 질서, 우리가 모르는 대우주의 생명 질서가 있다.
 
저자는 "태중의 아이를 한 살로 보느냐, 보지 않느냐가 중요하다"며 "그건 자연과 단절된 문화 문명으로 사느냐, 아니면 대우주의 생명 질서를 바탕으로 오늘의 문명과 연결하며 사느냐의 문제로 연결된다"고 말한다.
 
'어부바 고개'에 나오는 '포대기는 한류다' 부분도 인상적이다. 한국인은 아기를 안고 자며, 포대기로 업고 다닌다. 한국의 포대기 육아법의 장점은 엄마와의 상호작용이다. 최대한 엄마와 밀착해 엄마 배 속의 환경으로 이어주는 것이다. 반면 서양에서는 아기를 낳자마자 요람에서 재운다. 다시 말해 엄마 배 속, 자연과의 단절이다. 산모가 미역국을 먹는 나라도 한국뿐인데, 이는 태중의 양수가 바닷물과 성분상 비슷하기 때문이다.
 
'호모 나랑스(Homo Narrans·이야기하는 인간)'로 남고자 하는 저자는 "생과 죽음이 등을 마주 댄 부조리한 삶. 이것이 내 평생의 화두였으며, 생의 막바지에 이르러 죽음 아닌 탄생의 이야기를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부산일보 김상훈 기자 neat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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