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학자가 풀어쓴 여성 투쟁 이야기
 몸·패션·기술·노동·정치 등 8개 분야
 여성 생존 도구·증거 100개 사례 언급
 세탁기·타자기·냉장고 여성해방 상징
'히잡'도 가부장제·이슬람 혐오 저항
'잔소리꾼 굴레' 등 여성 학대도 제시



75쪽에 나오는 사진 한 장. 문화적인 충격을 가한다. 보기에도 마음이 너무 불편하다. 여성의 머리와 목둘레에 묵직한 쇠틀로 만들어진 장치가 걸쳐져 있다. 정면에는 입속으로 고정되는 돌출부가 있어 여성은 혀를 움직이지 못해 물을 마실 수도, 음식을 먹을 수도, 말을 할 수도 없어 보인다. 이 쇠틀은 '잔소리꾼 굴레'(scold's bridle)로 일명 '브랭크'(brank: 말을 함부로 하거나, 남을 험담하는 여자를 처벌하는 도구)로 불린다.
 
이 폭압적이고 가혹한 도구는 16세기 스코틀랜드에서 사용됐다. 1546년 8월 메리언 레이란 여성은 이웃을 간통죄로 고발했다가 다수의 비방 혐의로 스코틀랜드 스털링의 법정에 서게 되었다. 메리언은 '문제가 있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고소인들의 용서를 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런 다음에는 24시간 동안 '일체의 휴식 없이' 입을 막는 굴레를 채우는 고문을 받아야 했다. 이 사건은 '잔소리꾼 굴레'의 사용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 중 하나다. 당시 영국에선 여성을 억압한 이 도구를 통해 남성의 권위를 공고히 하고 사회적으로 용인된 젠더 구조를 재확인했다. 잔소리꾼 굴레는 1540년대부터 18세기까지 영국에서 사용됐고 1967년에 이르러서야 영국 형법에 의해 굴레를 씌우는 행위가 금지됐다.
 
<100가지 물건으로 다시 쓰는 여성 세계사>는 '세계 여성의 날'(3월 8일)을 전후해 읽어볼 만한 책이다. 여성의 역사를 오래도록 연구해 온 두 명의 영국 여성학자는 여성 생존의 도구와 증거 100개를 통해 여성 억압과 투쟁, 연대와 해방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풀어냈다. 이들은 100개의 도구와 증거를 여성의 몸과 모성, 사회적 역할의 변화, 기술의 진보, 패션과 의상, 소통과 이동, 노동과 고용, 창작과 문화, 여성의 정치 등 총 8개 분야로 나눠 광범위한 여성사의 전말을 담아낸다.
 
저자들은 여성이 남긴 풍부한 유산을 통해 여성이 어떻게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성에 순응하도록 조장됐으며, 그러한 압박감에 어떻게 맞서왔는지를 들려준다.
 
책의 초반은 '잔소리꾼 굴레' '아내 판매 광고' 등 요즘과 너무 동떨어지고 여성에게 우울한 이야깃거리가 많지만, 중반부터는 여성의 생존, 투쟁, 해방의 상징을 드러내는 도구들이 많이 등장한다. 1966년 영국의 바클리 은행은 여성을 타깃으로 한 신용카드인 바클리 카드를 100만 장 넘게 발급했다. 신용카드는 여성들에게 자유, 권한, 자립의 상징이다. 1970년대 들어 미국과 영국에선 신용, 담보, 신용카드는 중요한 페미니스트 이슈였다.
 
이뿐인가. 경제학자 장하준이 '인터넷 발명보다도 여성들에게 더 큰 변혁을 일으켰다'고 말한 '세탁기', 여성 고용의 영역을 확장하고 싼 임금으로 남성 인력을 대체하게 한 '타자기'는 물론 평범한 주부 플로렌스 파파트가 개발한 '전기냉장고'처럼 여성이 직접 발명의 주체가 된 물건들도 있다. 무슬림 페미니스트들이 쓴 '히잡'이 가부장제와 이슬람 혐오에 저항하기 위해 쓴 상징이었다는 점도 흥미롭다.
 
영국의 여성 건축가 엘리자베스 스캇은 여성사에서 꼭 기억할 인물이다. 그는 1932년 개관한 왕립 셰익스피어극장을 설계하며 남성 위주인 산업의 장벽을 뛰어넘었다. 그는 1926년 화재로 파괴된 셰익스피어기념극장을 대체할 건물을 짓기 위해 1927년에 열린 공모에 참여해 수주에 성공했다. 그가 설계한 왕립 셰익스피어극장은 크게 주목받았고, 여성 건축가란 직업이 확산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서양 최초의 여성 직업 화가였던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예술혼도 강렬하다. 그의 그림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가 대표적인 작품. 성서에 등장하며 정조와 덕망을 상징하는 여성 유디트가 그의 하녀 아브라와 함께 적국인 아시리아의 장군 홀로페르네스를 참수하는 장면을 담았다. 두 여성이 주인공이고 한 남성이 피해자가 되는 장면을 폭력적으로 묘사해 당대 통념을 전복한 이 그림은 여성들이 연대를 통해 역경에서 승리하는 방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제약과 한계를 이겨내고 변화하는 존재인 여성을 확인할 수 있는 책이다.
 
부산일보 김상훈 기자 neat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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