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권 시인

꽃 피고 새 우는 봄날이다. 3월이라는 소식에 물렸다. 그대의 향기가 봉투를 열고나올 거 같은 날이면 추억의 언덕으로 올라가서 아름다운 전갈을 기다린다. 이 전갈은 붉은 소인을 물고 황량한 사막을 가로질러 온다. 온갖 생각으로 퍼 올린 여러 겹의 이름을 두르고 온다. 오만가지 생각을 멈출 수 없는 것도 질병이라지만, 그리움은 오래 떠돌다가 뜻밖의 소식을 물고 왔다. 전갈이라는 편지에 물려왔다.

우리는 오래전부터 편지를 써 왔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봉투 속에 담겨서 그녀에게, 혹은 그 남자에게 전달되어 약속의 날들이 이어졌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것이 꼭 연서가 아니더라도 긴박한 사연을 담고 있거나 요즘처럼 흉흉한 소식에 물려 떠다니는 괴물일지도 모른다. 그 소식이라는 전갈에 물려 행복해지는 사람과 불행이 겹치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소식을 물고 오는 전갈은 다양한 모습으로 전이되고 있다.

편지를 쓰고 밀봉하여 멀리 보내는 것은 헤아릴 수 없는 막연한 시공간에 당기는 기대감과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믿음이 있을 것이다. 천년의 밀레니엄 행사라든지 타임캡슐을 묻어두는 행사도 일종의 후대에게 전하는 편지일 것이다. 이런 희망의 편지를 받아 본적이 언제였던가? 아니면 편지를 써 본적이 있었던가? 그러나 두 가지 모두 까마득한 일이 되어버렸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편지 속에 말은 달달하다. 오래되고 잘 발효된 음식처럼 먹고 또 먹고 싶어진다. 단어하나, 한 구절을 읽을 때 마다 사람의 향기가 난다. 바람이 불지 않아도 회오리치는 감동이 있다. 아름다움으로 치장되고 도금된 말들이 상대방의 가슴으로 들어박혀 그 사람의 향기를 복사해 내곤 한다 그러면 나는 자꾸 읽고 싶어지고 또, 쓰고 싶어질 것이다. 이때부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상상의 여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4백 년 전, 지아비가 죽어 관 속에 묻은 연서가 있다. 원이 엄마라고 알려진 가슴 애절한 사랑의 이야기를 망자에게 써 보낸 것이다. 그것도 답장 없는 관 속에 넣어서 보낸 것으로 안동시 정상동 이응태(1556~1586)의 묘 이장 중에 발견된 아내의 사부곡이다. 종이가 모자라서, 할 말이 너무 많아서, 한지 귀퉁이로 돌아가면서 빽빽하게 써내려 간 한글 사부곡이 심금을 울려주는 편지였기에 지금은 그 사연을 기리는 동상까지 만들어져 있다고 한다.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 통영우체국에 새겨 놓은 청마 유치환의<행복>이라는 서간문이다. 이것은 청마가 이영도시인에게 보낸 연서로 1967년 교통사고로 청마가 돌아가시자 그 편지 일부를 책으로 엮어낸 것이다.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했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사랑의 연서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 주고받는 사람 모두 행복한 것은 자명할 것이다.

문자가 가득한 오늘이다. 핸드폰에서 연신 울려 대는 문자의 바다에서 향기를 맡아본다. 달콤한 언어의 향기는 날아가고 억센 뼈대만 남아있다. 보고 싶다는 말도 거짓으로 들린다. 더구나 카톡이라든지 주고받는 메시지에는 간단체로 적힌 문자가 외계체 비슷하다. 신조어의 뜻을 잘 몰라 딸아이에게 물어보기도 한다. 문자의 온기가 하나도 없는 기계로 찍어 보낸 문자는 지구의 외딴 곳에 사는 사람 냄새를 풍기기도 한다. 만능 스마트폰에 물려 아름답고 향기로운 자기 언어를 잃어버린 것이다.

친필과 손가락의 협잡, 친필을 많이 쓴 서예가들은 손가락의 여진을 많이 겪는다고 한다. 붓을 오래잡고 글을 쓰다 보니까 생긴 손 떨림일 것이다. 지금 우리는 어떤가? 부모 자식 간에도 편지 한 장 쓰기도 어렵다. 더구나 남과의 사이에 따뜻한 편지 한 장 기대하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고작 소식이란 게 관공서 고지서나 잘 밀봉된 카드명세서 뿐이니 말이다.

우리는 모두는 외로운 사람들이다. 이 외로움은 인간세상 멀리까지 여행을 하게 만든다. 이것을 편지라는 매체에 적어 보낸다면 받아보는 누구라도 전갈이라는 소식에 물려 같이 여행을 하게 된다. 너와 나 사이, 무한한 상상력이 그리움의 시공간에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활착하게 될 것이다. 그립다는 생각이 들 때면 누구에게나 편지를 써보자. 그리고 그 편지를 받는 이는 기꺼이 전갈이라는 소식에 물려 꼼 짝도 못하게 되는 나의 포로로 만들어보자. 이 봄처럼!    김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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