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권 시인

소리의 바퀴들이 공원을 훑어간다. 내가 떨어뜨린 꽃잎과 다리에 걸리는 바람의 안부를 묻는다. 꽃을 피우기 위한 세상의 소리들이 내 가난한 푸른 숲에서 그림자를 키우고 있다. 숲 속에서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리는 수단처럼, 생명의 소용돌이를 몰고 다양하게 내 안으로 감겨든다. 새소리, 바람소리가 발설하지 못한 5월의 소리로 아우성인 공원에서 나는 어떤 걸음으로 걸어가는가?
 
담장을 타고 넘어오는 붉은 장미의 소리는 처연하다. 피고 지는 속도가 바람의 속도처럼 빠르기도 하겠지만 그 속에 존재하는 소리들이 계절이라는 시간을 돌리고 있다. 한 폭의 햇살을 품고 가는 당신의 표정을 그린다. 출구가 없는 공간에서는 존재하는 빛과 어둠의 소리들이 침잠의 고요를 낳는다. 깊이 모를 그 곳이 내가 오래된 슬픔을 채록하는 공간이다.
 
어쩌면 이 슬픔은 내 안에 돌고 있는 생명의 소리인지도 모른다. 내가 수많은 꽃잎 중에 하나, 또는 그 소리들에 섞여 있는 새처럼 함께 아름다운 여행을 떠나면서 그 곳에 존재하는 최초의 울음을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이 모두 가방 속에 담아 놓은 희망의 소리들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 소리가 환청처럼 불편한 소리로 울려 나오기라도 한다면 꽃잎이 떨어질 때마다 다른 목소리의 영혼이 탄생할 것이다.
 
나에게 있어 가장 큰 공감대를 형성하는 울음은 내 안의 공포 이전에 생기는 소통의 소리로 내가 일찍이 경험한 인간의 태곳적 소리인 것이다. 아이 울음소리에는 거짓이란 게 섞이지 않는다. 이 울음은 언어를 구분하지 못할 때 내는 단순한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어와 비언어의 구분이 확실해지면서 이 울음은 감정의 절제로 이어진다. 감정이 풍부해서 잘 우는 것과는 달리 사회생활을 하면서 감정적 절제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울음의 소리들은 오히려 비효율성의 역효과를 가져오게 된다.
 
소리는 익숙한 것과 익숙하지 않는 것들도 있다. 내 손에서 조금씩 감겼다가 풀리는 소리는 아름답다. 나로부터 생겨난 소리가 다른 사물과의 결합과 해체를 거치면 새로운 우주가 생겨난다. 바닷가에 가면 자갈 위를 구르는 파도가 있다. 자르르 구르는 모난 돌의 시간을 파도는 깎는다.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의 연속성이 조약돌에 흔적을 남기는 것이다. 오랜 시간 제살을 깎다가 가는 파도는 오히려 야문 돌 속에 물금처럼 흔적을 새겨 넣고 돌아간다. 자르르 쓸리는 돌 속에서 커다란 돌고래의 함성을 나는 꺼내기도 한다.
 
멀리 가지 않아도 다양한 소리들이 자라는 생명의 들판이 있다. 가락 들판에는 다양한 소리들이 자란다. 봄밤에 물을 가득 채운 논에는 개구리들이 모여 밤을 끌고 간다.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나면 일시에 침묵으로 흘렀다가 아직 끝날 때가 아니란 듯이 요란한 소리는 계속된다. 이 개구리 울음은 짝을 부르는 구애의 소리인 것이다. 어떤 여류 시인은 개구리가 우는 것을 보고 서로를 부르는 꼴림의 완연한 현상이라 말했다. 즉 꼴림은 떨림으로 싹이 트고 이 떨림으로 인한 감동이 설렘의 사랑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무한한 꿈의 소리들이 심어지는 봄의 들판에는 침묵의 소리들이 꿈틀거리고 있다. 지난겨울을 보내고 숨 쉬는 들판에 비가 내리고부터 새로운 소리들이 생겨난다. 윗논에서 아랫논으로 물 흐르는 소리, 무논에 트랙터소리, 힘찬 생명의 푸른 소리들이 농부의 은빛 접시에 담기는 것이다. 나는 무한하게 자라는 이 소리들을 사랑한다. 뚜렷한 생명의 빛깔로 아우성치는 소리야말로 내일을 잉태하고 내가 키우는 5월의 소리, 꼴리는 소리인 것이다.
 
침묵의 소리들에게 나는 간절하고 단단한 주문을 건다. 네 웃음이 맑아서 속이 훤히 보이는 소리들, 악몽이 물러나고 희망의 씨앗이 돋는 소리로, 화분에 꽃이 피는 소리로 말한다. 외부로부터 자극이 없는데도 소리를 느끼는 환청이 아닌, 듣는 것을 멈추어도 들리는 파랑의 소리로 돌아오라고 말한다. 저기 무표정의 마스크들, 밟아도 둥둥 떠다니는 소리들, 너의 안부를 물어보고 소리친다. 조리개를 조여도 가장 밝은 빛으로 돌아오는 빛의 소리들을 들여다본다.    김해뉴스

저작권자 © 김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