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민주 수필가

백문 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은 백 번 듣는 것은 한 번 보는 것보다 못하다는 뜻으로 '한서'(漢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여기에서 나아간 것이 '백견 불여일행'(百見不如一行)으로 백 번 보는 것은 한 번 행하는 것보다 못하다는 것이고, 더 나아가 '백행 불여일교'(百行 不如一敎)로 백 번 행하는 것은 한 번 가르치는 것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르칠 기회가 누구에게나 주어지지 않음으로 그 의미를 찾기가 쉽지 않다. 
 
나에게도 우연하게 이런 가르침의 기회가 왔다. 지역의 도서관에서 시민을 위해 강의 장소를 무료로 제공한다고 했다. 사용 조건은 한 달에 두 번 이상 정해진 시간에 강의실을 사용해야만 된다는 것이다. 내가 속한 문학회에서는 월에 한 번 정도는 문학특강을 열면 되는데 두 번은 무리가 있어 강의 장소를 포기해야 할 형편이라고 했다. 장소를 포기하기가 아까워 매월 한 번은 시와 수필 쓰기에 대한 문학 강좌를 내가 열겠노라고 대뜸 자청을 해 버렸다. 
 
짧은 지식으로 나보다 나은 사람을 가르친다는 것이 분에 넘쳤다. 온 힘을 다해 성의를 보여 준 것에 만족해야만 했다. 강의계획을 세우고 한 번쯤 연습하는 과정에서 오는 배움이 커 강의를 통해 얻는 게 많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지만 강의를 듣는 사람의 반응은 좋지 않아 보였다. 그래서 내가 생각해 낸 것은 강의를 받는 사람들이 토론할 수 있도록 토론의 장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방법을 바꾼 첫날 원형(archetype)에 대해 강의할 때의 일이다. "사물이 가지고 있는 근원적 양상을 일반적으로 원형이라고 한다. 사람이 뱀을 보고 무서워하듯 사전경험 없이 집단이 공유하는 심상을 의미하는데…" 본론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한 사람이 원형에 대해서 반기를 들고 열변을 토했다. 이러한 이론으로 해서 작가가 쓴 개성적인 글을 원형의 틀에 가두어 단순하게 만들어 버리고, 새로운 작품을 써도 몰개성적으로 평가되는 현실이 부당하다는 것이다.
 
모든 문학작품은 백지 위에서 자기만의 개성으로 쓰여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반드시 많은 독자가 작품을 좋아해야만 한다는 사고도 버려야 한다고 했다. 이에 반해 또 다른 사람은 원형을 부정함은 문학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원형을 벗어나 개성적인 글을 쓰더라도 독자들에게 읽히지 않으면 좋은 글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여러 철학이론을 곁들여 깊이 있게 주장했다.
 
나중에 가서는 원형을 부정하는 쪽과 긍정하는 쪽으로 나뉘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토론이 이어졌다. 나는 강의를 진행하는 입장이지만 미흡하여 정리를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여 창피하기도 했다. 여기에서 원형에 대한 부정과 긍정은 나에게 중요하지가 않아 보였다. 굳이 중요하다면 다양한 견해로 배울 점이 많았다는 것과 다양성 자체를 인정함이 옳다고 느낀 점이다
 
가르치는 사람은 참마음으로 현재의 상태에서 원하는 상태로 인도해 주는 사람으로 자리하는 것이 바람직한 모습이 아닐까 한다. 이제는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많이 줄었다. 날이 갈수록 강의에 대한 반응도 좋아졌다. 준비하는 시간이 길어져 힘들어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지만, 강의를 마치고 난 후의 보람이 더 컸다. 
 
좋은 강의를 보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이 많고 열띤 토론이 이루어진다. 그러다 보면 고정관념이 깨지고 깨지고 이야기가 계속 이어져 시간은 금방 지나간다. 다양한 의견으로 토론의 과정을 거치면서까지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하는 여운이 남아 있으면 좋지 않을까? 가르치고 배우는 열정에서 인간적인 교류와 유대감이 생기고 사람은 변하고 발전한다. 
 
나에게 있어 강의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강의는 남을 가르친다기보다 나의 배움에 있었다. 강의를 준비하고 여러 사람이 토론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많이 배웠다. 기회가 된다면 누구를 대상으로 하든 자청하여 강의를 한 번 해보길 권한다. 백행 불여일교란 참뜻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김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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