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 전후와 계승 등 한국 근대사 통괄
'사람이 하늘' 시대정신 부응 민중운동
 의병, 3·1운동과 4·19혁명으로 이어져



<이이화의 동학농민혁명사> 전3권은 얼마 전 83세로 타계한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의 유작이다. 동학농민혁명 전과 후, 그 계승까지 전체를 흔치 않게 통괄한 책이다.
 
고인은 평생에 걸쳐 동학농민혁명 연구에 매진했다. 그 혁명이 한국 근대사를 밝히는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 우리 근대사는 온갖 모순과 갈등이 얼키설키한 가운데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꿈틀거림을 내재하고 있다. 민란의 시대였던 19세기를 승화한 것이 동학농민혁명의 횃불이었고, 그 횃불은 우리 근대사에 내재한 꿈틀거림을 집약한 상징이라는 것이다.
 
혁명이란 용어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동학농민군이 곧바로 혁명 권력을 쟁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현대사를 관통한 민족사적 맥락에서 1894년 갑오년의 그 횃불은 항일 의병, 3·1운동으로 이어지고 해방 후 4·19혁명, 5·18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그리고 촛불혁명에까지 면면히 이어졌기 때문에 당연히 혁명이라는 것이다. 동학농민혁명은 '사람이 한울이다'라는 동학의 기치를 내걸며 불평등과 신분 차별을 넘어서려 했다. 그러나 동학 그 자체에 머문 게 아니었다. 동학은 시대와 만나 한 차원 승화된 것이었다. 동학사상은 민중운동이 되었고 역사가 되었다.
 
하지만 갑오년 당시부터 그 내부에는 여러 흐름이 뒤섞여 있었다. 1894년 북접은 최시형 계열로 온건파였고, 남접은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이 참여한 강경파였다. 또 남접만 놓고 얘기할 때도 전봉준이 상대적으로 온건했다면, 김개남은 조선왕조를 부정한 혁명적 강경파였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시기의 아쉬움은 있을 수 있으나, 결국 남북접과 강온파는 모두 합쳐 싸움에 나선다. 그것이 시대적 요구였다.
 
동학동민혁명은 형식상으로 미완의 혁명처럼 보인다. 공주 우금치·곰티전투의 실패로 서울 진격은 실패했다. 이이화는 이를 두고 "한국 변혁운동 역사에서 가장 안타까운 순간"이라고 썼다.
 
2차 봉기 실패 후인 1894년 12월 전봉준과 김개남은 같은 날에 옛 부하와 친구의 밀고로 붙잡힌다. 김개남은 현지에서 곧바로 처형됐고, 전봉준은 이듬해 3월 30일(음력) 서울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전봉준은 당시 재판을 받으면서 "사람이 하늘이다. 내 피를 종로 거리에 뿌려라"고 의연하게 말했다.
 
2018년 내 피를 뿌려라, 고 전봉준이 일갈했던 그 종로 거리에 전봉준 동상이 세워졌다. 그가 순국한 날, 바로 순국한 그 터였다. 전봉준 동상은 서서 하늘을 가리키는 모습이 아니라 들것에 실려 가던, 앉은 그 모습이다. 촛불 시민과 대화하며 같은 눈높이로 역사를 매섭게 응시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역사다.
 
하지만 물어본다. 과연 어떤 역사였고, 어떤 역사인가. 수많은 동학군들이 처참하게 목숨을 잃었고, 그들의 피로 이 강산이 물들었으며, 그 후손들은 숨어 살았던 역사다. 또 이용구를 비롯해 동학이 배출한 많은 이들이 친일파로 변절해 호의호식하면서 살았던 역사다.
 
그러나 그런 좌충우돌의 누더기 같은 시간 속에서도 동학농민혁명 정신은 면면히 이어졌다. 3·1혁명 때 독립선언서에 이름을 올린 33인 중 손병희 외 9명이 동학농민군 출신이었다. 그들은 갑오년 이후 25년이 지났는데도 일본 경찰에 끌려가 동학군 출신이라는 것을 당당히 밝혔다.
 
동학농민운동은 어떻게 이어졌던가. 봉오동전투의 독립운동가 홍범도는 전봉준을 마음의 표상으로 삼았다고 한다. 한용운 여운형 김구에게도 동학혁명의 불씨는 꺼지지 않고 이어졌다. 전봉준에게는 2남 2녀의 자식이 있었다. 그 자식들은 머슴 노릇을 하거나, 성과 이름을 바꾸고 숨어서 살았다고 한다. 현재 전봉준의 친손은 찾을 수 없다고 한다. 그래도 전봉준으로 상징되는 동학농민혁명의 그 정신은 끊어지려 하고 희미해지려 할수록 더 끈질기고 또렷히 이어져 왔다. 그것이 우리 근현대사이다. 
 
부산일보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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