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성자 시의원

고향이 임하댐에 수몰됐던 시인 유안진은 소설 '바람꽃은 시들지 않는다'에다 실향의 안타까움을 쏟아냈다. 임하댐 수몰지역에 관한 기록물은 도로와 농지, 집을 비롯해 개발 직전 현황을 상세하게 남겼다. 수몰의 경우 댐 물이 빠지면 옛 자취가 웬만큼 드러나기도 하지만, 오늘 날 도시개발은 완벽한 철거와 깊은 터파기 등 첨단 공법으로 흔적이 파괴돼 버려 과거 형태를 추적하기 힘든 경우가 허다하다.
 
1993년 수질 조사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장유 신안계곡을 찾았다. 물 흐름을 따라 수가리, 장유, 서낙동강을 거쳐 낙동강 하구언 까지 거점마다 시험수를 채취했는데, 특히 장유 일원을 스캔하듯 디뎠었다. 그 당시 장유는 온통 초록 들판이었다. 산자락에 아담한 마을들이 고향 같았고, 월봉서원은 덩그런 건축물이었으며, 그 뒷산 황토 빛이 유난히 선명하고 청량해서 그 매혹에 이끌려 종종 장유를 찾곤 했다.
 
2008년 장유는 한창 진행 중인 공사로 어수선하고 번잡했다. 들판과 마을이 사라지니 어느 지점에 어떤 물상이 있었던지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장유가 발전하는 것은 좋은 일이었지만 옛 모습이 잠식되는 속도가 콸콸 흐르는 계곡물만큼이나 성급해 보여 장유신도시가 주는 기대감보다 아쉬움이 앞섰었다. 계곡이 천연한데, 저 물이 장유 뜰을 적셔 누대에 걸쳐 옥토를 일궜을 텐데, 이제는 스며들 재간 없이 조성된 수로 따라 끌려갈 수밖에 없겠구나, 측은한 마음이었던 그날 시를 썼다.
 
'맨 처음 뿌리내린 나무/ 첫 잎이 뿜어낸 이슬로/ 장유오라버니 세수하신다/ 철의 기상 수로(首露)따라/ 바위 깨고 돌 부수어/ 금벌 마련했더니/ 오라비 누천년 기도가/ 레미콘 소리에 굴종 한다/ 바윗돌 후릴 물의 저 위세는/ 아파트 골 샛바람 인심에 짓눌려/ 닦여진 수로(水路) 따라/ 한숨 소리로 흐르고/ 콘크리트 스치다 닳은/ 오라비 금빛 기도는/ 옛 물길 쪽 흙더미로 숨어들다/ 진공청소차에 들켜 떠나고 있다/ 먼 곳에서 들려오는 도금된 기도 소리...' <허황옥의 기도, 하성자>
 
인구가 늘어나고 아파트 숲과 도시다운 멋과 삶의 질은 김해를 성장시키는 데 긍정적 역할을 했다. 그럼에도 장유, 북부동, 내외동, 주촌면에 들어선 대규모 아파트 단지는 그 터에서 오래 살았던 이들조차 헛갈릴 정도로 흔적을 뭉개버렸다. 30년 남짓한 동안에 김해 취락구조는 대 변혁기를 보냈으며, 발굴의 여지조차 남겨두지 않은 채 지형지물이 혁신돼버렸다. 개발 전 그 터에 있었던 취락 형태는 거의가 자연부락이었다. 
 
짧게는 100년 전후, 길게는 수천 년 역사를 품고 오면서 큰 변화 없이 유지돼 온 곳이었을 것이다. 도시화 이전에 면면히 이어져 온 김해 터가 어떤 형태의 취락구조였던지 명백하게 추적하기는 힘들 것 같다. 경상도 지리지 이후 최근 30년 이전 김해 지형. 지물 사료로 기능할 만한 것, 김해 지리 역사 속에 꽤나 큰 공백이 생겨버린 건 아닐까. 부산 문현동 안동네 '돌산 마을지', '태안리, 미목 마을지'를 보며 적은 예산을 들인 사소한 마을지가 소중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는 것에 눈이 번쩍 뜨였다.
 
"취락(촌락. 마을)은 좁은 의미로는 가장 중심적인 요소로서 가옥의 결합체로 규정하고 있으나 넓은 의미로는 인간생활과 관련된 생활무대의 전반을 가리키므로 가옥은 물론 경지·도로·수로·창고·울타리·공한지 등을 모두 포함한다."(출처: 다음백과) 
 
신라민정문서(新羅民政文書)'는 그 당시 신라의 취락구조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담고 후대인 지금 중요한 자료로써 기능한다. 후세를 위해 기억을 줄 수 없으니 기록물이 필요하다. 대동첨단산업단지, 진례 일원 아파트 개발 사업 등 대규모 개발 범위에 드는 지역의 경우 사라지게 될 촌락(마을)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개발에 앞서 현황을 기록해 두면 좋겠다. 전문성 있는 '마을지' 제작은 '나무 한 그루를 통해 숲을 알 수 있도록 해 주는' 향토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지금이 가장 빠른 때'라고 하지 않던가.     김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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