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협회 보조금 영수증·영어 교재 등
30년 발품 팔며 모은 14개 수집품 소개
한국 근현대 사람들의 희로애락 담아



저자는 30여 년 전 서울대 국사학과 입학 뒤 강원도 양양군 오산리 선사시대 유적지로 첫 학술답사를 떠났다. 당시 주제 발표를 듣는 것이 따분해 심심풀이로 모래밭을 발로 헤집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빗살무기토기 파편을 발견했다. 1만 년 전의 사람들과 접속하는 감동을 느낀 저자는 그때부터 컬렉터의 길로 들어섰다. 하지만 수집한 물건은 아주 오래된 유물이나 값비싼 예술품이 아니었다. 사진, 영수증, 일기, 편지, 사직서 등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묻어 있는 생활 자료들이었다.
 
30여 년간 발품을 팔아 직접 찾아낸 자료들은 겉으로 보기에 사소하고 평범하지만, 수집품마다 역사적 스토리를 품고 있다. 그래서 저자는 새로운 수집품을 만나면 이것에 숨겨진 역사적 코드를 하나둘씩 추적했다.
 
<컬렉터, 역사를 수집하다>는 시대상과 거대한 역사적 사건의 이면을 드러내는 14가지 수집품을 소개하며, 거대 역사에 가려져 있던 보통 사람들의 역사를 생생하게 복원한 책이다. 14가지 수집품은 독립협회 보조금 영수증, 조선의 영어 교재, 지석영이 펴낸 <아학편>,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당시 손기정 사인, 다시 만날 동무들 사진, 신탁통치에 반대하며 피로 쓴 사직서, 해방 직후 콜레라 창궐로 인한 학생 귀향 명령 증명서, 한국전쟁 중 포로수용소에 갇힌 청년이 부모에게 보낸 편지, 한국전쟁 중 육상경기대회 기념사진 등이다.
 
책의 17쪽에 나오는 사진 한 장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1897년 독립문 건립을 위한 전국적 모금 운동 당시 밀양에 사는 안효응이란 인물이 성금 1원을 내고 받은 독립협회 보조금 영수증이었다. 이 영수증 한 장에는 풍전등화 같았던 구한말 역사가 새겨져 있다. 당시 독립문 건립 움직임이 왜 있었을까?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왕비와 민 씨 세력은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리하여 조선에 들어온 청군 3000명이 군란을 진압했으며, 이후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본격적인 내정간섭이 시작됐다. 임오군란 이후 조선은 청의 직접적이고 실질적인 속국 상태가 된 것이다. 1894년 청과 일본은 한반도의 패권을 둘러싸고 청일전쟁을 벌였고, 패배한 청은 1895년 일본과 시모노세키조약을 맺었다. 조약 1조에는 '청국은 조선국이 완전무결한 자주독립국임을 확인한다'가 나온다. 이로써 청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했고, 조선은 청의 실질적인 속국에서 벗어나 독립하게 된 것이다. 서재필이 창간한 <독립신문> 1896년 6월 20일 자 사설도 독립문 건립이 청으로부터 독립을 기념하는 것임을 명확히 드러냈다.
 
일제강점기 독립문은 파괴되거나 수난을 당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독립문이 쇠락하자 일제는 1928년 거금 4100원을 들여 대대적으로 수리했으며, 1936년에는 독립문을 고적 제58호로 지정하기까지 했다. 독립문은 일본이 청일전쟁을 통해 조선이 청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을 도와준 것이어서 일본의 은혜를 과시할 수 있는 상징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한국인이 독립문을 '항일 독립운동'의 상징으로 받아들인다. 독립문 바로 옆에 일제가 독립운동가들을 가두고 고문했던 서대문형무소가 있어서 이를 묶어서 항일 독립운동의 상징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독립문은 '청으로부터의 독립'이란 의미를 뛰어넘어 '모든 외세로부터의 독립'이란 상징적 의미를 부여받았다.
 
'한국전쟁 중 육상경기대회 기념사진'(213쪽)은 역사의 퍼즐 조각을 맞추는 짜릿한 묘미를 선사한다. 사진은 1952년 7월 강원도지역 학생 육상대회에 참가해 우승한 삼척공고 육상부의 기념사진이다. 1952년이라면 한국전쟁 중인데 어떻게 육상대회가 열렸을까? 이 조각을 찾기 위해선 한국전쟁 중 삼척 일대 상황을 살펴야 한다. 삼척은 북한군 치하에 있던 기간이 길지 않았고, 1·4후퇴 이후 북한군이 삼척까지 남하하지 못했다. 1951년 7월 휴전회담 이후 전투는 오늘날 휴전선 근처에서 고지전의 형태로만 일어났기 때문에 사진 촬영 시기는 예전의 일상을 회복해가던 때였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당시 손기정 사인'(97쪽)은 식민지 시기 조선인 금메달리스트 마라토너의 비애와 울분을 보여줘 가슴을 아리게 한다. 전라북도 익산군청 산림계 주사로 일하던 전우경이 1946년 1월 1일 신탁통치에 반대하여 쓴 사직서(134~135쪽)와 1952년 1월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북한군 포로 권봉출이 경북 예천에 있는 부모에게 쓴 편지(192~193쪽)는 격랑 속 한국 현대사의 비극적 단면을 보여준다. 이처럼 저자가 수집한 물건에는 한국 근현대를 살던 사람들의 희로애락이 스며들어 있다. 
 
부산일보 김상훈 기자 neat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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