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권 시인

잠을 설친다. 새벽이면 전차를 끌고 산을 넘어간다. 무수한 혁명과 야한생각들이 동트는 새벽을 달린다. 코로나로 인한 장기적인 거리두기가 계속되는 시국에 비까지 더한 국가적 우환에 걱정이 태산이다. 코로나로 인한 거리두기란 말이 요즘 너무 친근하게 들리기도 한다. 모두가 지칠 줄 모르는 폭군이다.
 
연일 동네가 물에 잠기고, 소가 지붕위로 올라가고,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연속으로 일어났다. 코로나 하나만 해도 경제활동이나 사회적 거리두기로 불안한데 물난리가 겹치니 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 하나님께 전화를 걸어봤다. 묵묵부답이다.
 
무섭게 달리는 것은 폭주족이다. 비도 그렇고 코로나19도 그렇다. 폭주족의 사전적 의미는 위법 개조한 바이크나 자동차를 타고 도로교통법을 무시하고 달리는 집단으로 일반적으로 잠재적 범죄 집단으로 인식되고 있다. 우리는 너무 빨리 달리는 열차를 타고 가는가? 아니면 당신의 배낭에서 책을 꺼내어 아주 천천히 읽으면서 가는가? 구분할 수가 없다. 외국에서는 라이더라고 하지만 이는 낭만과 여행, 또는 모험적 정신이 들어있는 경우가 많다. 그들의 연대기를 그린다.
 
당신의 배낭에서 책을 꺼내는 순간, 이미 늦을 것이라는 자책에 든다. 요즘이야기는 없는 사람들의 서사로 이어진다. 코로나로 인한 장기적 거리두기가 코로나보다 더 불안한 인간의 모습을 양태하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인간적 거리두기로 변모 되면서 모순과 불신이 넘치는 판에서 사회적 공감대가 무너지는 것도 사실이다. 불확실의 시대, 불확실한 서사로 극화된 사회적 분위기가 연대와 공감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이제 정치인도 연설대신 삽을 들고 수재민들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수해로 입은 물질적인 피해를 최단시간 안에 복구하는 것이 인간적, 정신적인 피해복구를 원만히 하는 것이다.
 
코로나가 창궐한다고 해서 무작정 단절의 시대를 보낼 수도 없다. 몸속에 들어와 사는 거미들이 내 몸을 갉아먹는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와서 이곳저곳을 기어 다녀야 하는 것들이 자꾸 가렵다. 뉴스에는 코로나 확산이 연일 보도되고 있지만, 비를 묻으면 빗물이 솟아오르고 책을 묻으면 그 위에 책의 문장들이 솟아나와 아름다운 꽃이 피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정오가 되면 배고픈 무리들이 찾아와 나를 뜯어먹고 간다. 나는 고별전을 치루고 있다.
 
대기 불안과 기압골의 영향으로 울음을 골수 관절까지 머금고 있다. 모두들 목구멍에다 머금은 울음을 내뱉지 않는다. 나는 이 기습적인 폭주가 빨리 사라지기를 바랄뿐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아픈 우환들을 싹 거두어 갔으면 좋겠다고 빌어본다. 울음은 슬픔으로부터 자신을 건져 내기 위하여 짠 눈물을 무작정 흘려보낸다. 물그림자 위로 묻어오는 빛들을 마른 수건으로 돌려 닦는다. 비의 슬픔으로, 코로나의 슬픔으로 세상을 닦는다. 
 
식당 간판에는 배고픔이 걸려있다. 내가 건너가는 사막 같은 들판에는 밥집이 있다. 그곳을 지나다가 우리는 같이 모여 밥을 먹는다. 모르는 사람끼리 아는 것처럼, 외로운 사람들의 입속으로 반딧불이가 날아오르고, 창밖의 풍경은 비의 슬픔을 전부 사용한다. 좋은 풍경과 소리는 금방 사라진다. 사라지는 각도를 따라 행복하게 나도 잊히는 것이다. 국지성 호우는 대체로 예견하지 못하는 위험성을 동반하고 있다. 국지성은 모호하다. 예고된 장마처럼 미리 선고받은 병명으로 고통 받는 것은 누구에게나 불행한 일이다. 아파오는 내 몸에 붕대를 감는다. 
 
뼈가 붉어지도록 흔들려본 적 있는가? 바람에 흔들리는 마지막이라 써 붙인 글씨가 유난히 흔들린다. 붉은 글씨가 안부가 되어 매장에 펄럭이다. 몸값을 낮춘 옷들이 매장을 걸어 나간다. 이별은 내가 선택하는 것, 어디를 건드려도 아프다. 차를 타고 지나다니면서 곧 사라질 고별전의 플래카드 아래를 지나간다.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유난히 많은 바람이 분다. 그 바람이 시드는 동안 폐업은 너의 가장 아름다운 결정문, 이제 나는 아무 곳에나 구를 수 있겠다. 하얀 붕대가 감긴 몸에서 새살이 차오르고 있다.    김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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