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애순 수필가

병원의 입원실은 무작위로 선출된 타자들이 약속도 없이 만나는 장소인 것 같다. 병실에서의 만남은 우연의 공간이고, 무의미하며 지극히 짧은 시간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처럼 친밀한 공간도 없으리라. 6인 병실이라는 열 평도 채 되지 않는 좁은 공간에서 열두 명이 함께 자고 먹고 민낯을 보인다. 좁은 냉장고를 조목조목 나누어 쓰느라 불편해 신경전을 벌이기도 하지만, 동병상련의 정을 나눈다. 방문객들이 가져온 음식도 친절히 나눈다. 이렇던 사람들이 밤에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티비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과 불을 끄고 일찍 수면을 취하고 싶은 사람들의 미묘한 심리적 대치가 일어난다. 코를 고는 보호자 때문에 예민한 사람은 짜증을 내기도 한다. 낮의 친절은 잊히고 원망이 앞선다. 이들은 이렇듯 서로를 불편해하면서도 낮이면 또 서로에게 위로를 건넨다. 
 
병실은 걸러지지 않은 일상이 그대로 드러나는 면대면의 공간이다. 익명의 디지털 세계가 판치는 밖의 세상과는 완전 대조적인 별천지다. 짧은 만남이지만 이들은 서로에게 긴밀한 타자로 존재하는 게 아닐까. 병실이라는 아주 지엽적이고 무규칙한 공간일지라도 서로에게 불편을 주고 도움을 주는 타자가 존재한다는 것은 다행스런 일이리라.
 
문화비평가이자 철학자인 한병철 작가는 그의 저서 「타자의 추방」에서 현재 우리의 삶에서 타자가 존재하던 시대는 지나갔다고 일갈한다. 고통으로서의 타자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타자의 추방은 한 개인이 어떤 방해도 받지 않아 면역 항체 생성이 어려워지고 결국 자기파괴를 가져온다고 말한다. 우리의 삶에서 '타자의 부정성'은 나의 삶에 브레이크를 걸고 나를 힘들게 하는 대상이지만, 이것이 에고이즘에 빠져 홀로 질주하는 삶에 제동을 건다. 타자의 존재는 우리에게 항체를 만드는 역할을 하며 우리를 건강한 삶으로 유도하는 힘이라는 설명이다. 
 
이러한 의미 있는 타자가 우리의 일상에서 사라져간다. 인류는 정-반-합의 원리로 발전해왔으며 바람직한 삶의 방식을 고민해 왔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서서 '정'에 대항 하는 '반'의 과정이 사라지고 대신 같은 것들의 반복으로, 우리를 무한한 자기 매듭 속으로 얽어 넣어 서로 무관심한 병존을 하고 있다. 우리를 이렇게 몰고 간 대표적인 것이 익명의 디지털 세상이며, 차별화가 거세된 세계화의 폭력이고, 효율성과 생산성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성과주의 사회라 할 수 있다.
 
우리 삶에서 타자의 개념을 나 이외 타인을 비롯해 사물, 내게 끼친 사건, 환경, 자연, 우주 등으로 확장한 세계로 본다면 인간에게 가장 큰 '타자의 부정성'은 어떤 것일까.
 
인간에게 있어 가장 자신을 힘들게 하는 것은 질병이 아닐지. 몸을 아프게 하는 병은 자신의 삶에 있어 가장 큰 타자의 부정성이 끼어든 상황이라 본다. 인간에 있어 몸은 가장 기본적인 삶의 조건이다. 몸이 있어서 어떤 사건이 일어나고 관계가 형성 되고 삶이 이어진다. 이렇게 볼 때 질병은 인간의 삶에 있어 가장 직접적이고 가장 위협적인 부정성을 띤 타자로 볼 수 있다. 긴 시간 병에 시달리면 사람은 정신적으로 나약해진다.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가던 사람들도 몸이 고장 나면 삶의 질이 떨어질 뿐 아니라 자신감을 잃어간다. 정신의학자이며 호스피스 운동의 선구자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그의 책<인생수업>에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과의 인터뷰 내용을 담았다. 죽음에 임한 사람들의 최초의 감정은 병에 대한 불수용, 분노, 다음은 상실감 그 후 병을 받아들임, 이어 타인에 대한 용서, 마지막으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극복이라는 감정변화단계를 보인다고 설명한다. 질병이라는 '타자의 부정성'은 죽음 이전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고 한 단계 성숙한 삶을 만드는 긍정적인 요인이 될 수 있다. 병을 극복하고 나면 조금은 자신의 집착에서 벗어나 세상을 새롭게 보고자 하는 여유가 생겨나지 않을까.    김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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