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권 시인

나는 무한정 높아진다. 몇 번의 매미가 울고 또, 몇 번의 바람이 불더니 기어코 여름은 날개를 만들어서 왔다. 오색의 날개를 만들어 온 여름은 뒤꽁무니 선명하게 몸에다 수를 놓았다. 왔다가 가는 것에는 흔적이 있다. 얼음을 녹여 끓이는 밤이 지나고 오래 들여다본 계절이 삭아서 떨어지면, 나무의 거리는 조용해져서 가로누운 벤치로 올라간다. 오늘도 나는 아름다운 눈빛을 하고 저산을 돌아서 온다.
 
신은 빗소리를 꿰매느라 이번 여름을 다써버렸다. 지루한 장마였다. 떨어진 빗방울을 쓰다듬는 아침이 오면 고양이가 그린 평화로운 빛의 궤적이 살아난다. 이 빛과 어둠의 색을 불러내는 가을의 유전자는 무엇일까? 삼키는 것마다 오색으로 변하는 입속으로 밀어 넣는 시간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빛나고 있다. 대나무에 앉은 새를 쳐다본다. 오동나무에 내려앉은 작은 새를 올려다본다. 날아가는 것과 날아가지 못하는 시간들이 함께 물들어 있다.
 
이 계절에는 멀리서 오는 것과 가까운 데서 일어서는 열망들이 함께 있다. 축복받는 이름과 축복받지 못하는 이름들이 나무에 걸려있다. 평생 지워도 모자랄 열망들을 입 큰 새들이 쪼아 먹고 있다. 날개큰 새들이 앉아 있는 나무들은 가지가 휘어지고 무덤과 가까워지는 시간들이 아래로 떨어진다. 죽기 살기로 꽃을 피우는 나무는 벌이 도착하고부터 붉은 눈길로 서로를 위무하며 결박하고 있다.
 
나무는 안감이 좋은 옷을 입고 땅속으로만 길을 내고 있다. 나무의 문장은 푸르다. 나무는 밤마다 아무도 모르게 걸어가지만, 사람은 사람끼리 서로를 묵어서 하루를 간다. 달력이라는 나무에 자기를 묶어두고 간다. 일기예보를 유심히 살피면서 간다. 여물지 않는 봄날은 없다. 다만, 먼저 익어 떨어졌거나 날아가지 못한 시간들이 떨어져 수북한 것은 슬픈 일이지만 평생 한곡만 부르는 새의 노래를 나무 아래에서 듣고 있다. 절창이다.
 
소리가 분리되고, 시간이 분리되고, 색이 분리되는 시간이 오면 나는 물속에 잠긴 달을 들여다본다. 달은 눈 속에 있지만 나는 물 밖으로 분리된다. 꽃들은 달을 들어 마시고 붉은 색으로 변해간다. 내가 구르고 꽃이 구른다. 굴러서 가는 것들이 대성동 벤치위로 타고 앉아 노래를 부르고 있다. 구르면서 뒹굴면서 노래 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바람 부는 곳으로 불려간다. 나는 나를 내다 버린다.
 
모두 버리고 난 다음에 나무는 나무의 시간을 짚으면서 간다. 전방주시기로 몇 백 미터 앞을 보기도 하고 백미러로 후방을 비추어 보기도 하면서 간다. 시간은 그렇게 앞으로만 가는 것이지만 나무의 시간은 한 계절에 한걸음씩 자리를 옮겨가는 것이다. 나는 꽃이 좋아 붉은 꽃밭으로 가서 하루를 놀다 간다.
 
은하사 탑 위로 둥근 달이 걸려있다. 탑의 뾰족한 보주가 달을 구멍 내고 있는지 둥근 달이 탑을 무너뜨리고 있는지 모를 달밤이다. 가을 달밤은 모두 한데 뭉쳐서 간다. 여기서는 산을 오르는 것과 내려가는 것들이 모두 엉켜서 지친 다리를 만지면서 간다. 이렇게 서로 궁굴리며 가는 가을은 모두 달 가는 쪽으로 창문을 내고 있다.
 
탑 위에 놓인 것들은 자꾸 높아진다. 탑 아래 떨어진 것들도 아련하게 깊어진다. 도시의 가을은 아파트 옥상에 심어 놓은 피뢰침에 찔리면서 왔다. 옥상위의 하늘은 더욱 시퍼렇게 멍이 들면서 높아졌다. 꽃을 따고 쌀을 씻던 가을 들판에서 나는 이 가을의 유전자를 찾고 있다. 가을의 유전자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손이 닿으면 금방 풀어지는 꽃대 위에서 잠시 앉았다 가는 고추잠자리가 되어본다. 나는 들판에서 입에 피가 고이도록 가을을 꿀꺽 삼켰다.
 
가을볕 속으로 걸어가는 것은 모두 가을의 유전자를 가졌다. 푸른 것들이 떨어져 내려서 빛나는 무덤이 된다. 바람이 불고 사랑이 불어와서 아름다운 가을 달밤을 수놓듯이, 저 가로등 아래로 걸어가는 낙엽들이 빛나고 있다. 가을의 유전자는 누가 심어 놓았거나 버리고 간 것이 아니라 그냥 감출 수 없는 것들이 내게로 와서 가을이 된 것이다. 가을은 그냥 흔들리면서 간다. 그냥 물들면서 간다.  김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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