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수만 김해뉴스 독자

최근 유투브에 나오는 반려견 훈련사를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다. 작고 약한 생물을 사랑하는 마음씨가 보기 좋고, 보호자를 대하는 그의 사려 깊은 태도가 좋다. 훈련 중에 보호자나 강아지에게 화를 낼 때 마저도 보호자를 사랑해서, 개를 사랑해서 그렇다는 것을 안다.
 
시청자는 모두 알 것이다. 문제견을 다루는 방송이지만 대체로 모든 문제는 보호자에게 있었다는 것을.
 
입질을 하는 것, 보호자에게 가스라이팅을 하는 것들은 모두 결과이지 원인은 아니다. 따라서 이를 못하게 훈련하는 것은 대증요법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에게는 만족스러운 훈련이지만 반려견의 마음 어딘가는 곪은 채로 남는 것이다.
 
훈련사의 교정이 감동을 주는 이유는 "이 반려견이 문제행동을 할까?"라는 고민을 먼저 한 후, 근본적인 원인을 고쳐 나가기 때문이다. 그가 문제견을 만나러 와서 가장 먼저 하는 것은 강아지가 어떤 환경에 놓여있는지 파악하는 것이다. 산책은 얼마나 자주 해주는지, 몸이 불편한 곳은 없는지, 보호자는 어떤 사람들인지 등. 
 
그리고 대부분의 문제는 강아지를 편안하게 해주고, 보호자와 강아지 간의 규칙을 명확하게 정해 놓고 지키는 것만으로도 해결된다.
 
프로그램명이 이미 말하듯이 세상에 나쁜 개는 없었다. 다만 문제견을 만드는 환경과 원인만이 있었을 뿐이다. 사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청소년인 자녀가 담배를 피우거나 게임에 빠져 살 때 윽박지르고, 뺨을 때리면 문제가 해결되던가? 어디까지나 '어른 중심'의 문제 해결일 뿐이다. 나는 교육을 하는 사람들이, 특히 어린아이들을 기르고 가르치는 사람들에게 이런 철학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세상에 나쁜 사람은 없다", "모든 사람은 훌륭하다"
 
철학자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이 나를 불러 세울 때, 그리고 타자가 그의 얼굴로써 연약함, 비참함을 드러내고 내게 호소할 때 우리는 '응답하는 주체'가 되어 '무한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한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나는 타자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방송을 보노라면 얼마나 사나운 개인지, 얼마나 영악한 개인지와 상관없이 모두 훈련사에게 '호소'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마치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에서 한국인을 만난 것처럼, 소매 끝자락을 붙들고 "제가 이래서 힘들었는데요", "이런 문제가 있었는데요" 하소연하듯이. 그리고 훈련사의 교정은 지배나 제압이 아니라 언제나 응답에 가깝다. "그래서 이렇게 된 거구나", "힘들게 해서 미안해, 그래도 이거(훈련) 해야 같이 살 수 있어"하는 식이다.
 
훈련사도 사람이다. 문제견의 행동이 심각할수록, 그리고 견주라는 사람들의 불손한 태도와 개에 대한 몰이해를 마주할 때마다 속이 탄다.
 
그러나 마치 그의 눈에 비치는 모든 강아지의 고통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마치 자유로울 수 없기라도 한 것처럼 앞으로도 그는 개를 위해, 반려견과 보호자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문화를 만들기 위해 힘쓸 것이다. 모든 중생을 구제하기 전까지는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무주처열반의 자세가 이러한 것일까. 그의 모습이 숭고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훈련사의 보살행을 응원한다.   김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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