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로왕릉은 김해의 대표적인 상징물이다. 왕의 무덤으로 인해 김해는 '가야 고도'로서 빛난다.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지만,  만약 이 수로왕릉이 훼손되어 없어졌다면 지금 김해의 처지는 어떠할까? 그런데 임진왜란 당시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뻔 했다.
김해를 침략한 왜적들은 수로왕릉을 파헤쳤다. 왜적을 피해 노모를 모시고 피란을 갔던 죽암 허경윤(竹巖 許景胤·1572~1646)은 이 소식을 듣고 급거 김해로 돌아와 왕릉의 봉분을 다시 쌓아올렸다. 죽암은 병자호란 때에도 나라를 구하기 위해 전답을 팔아 의병을 모았다. 죽암은 남명 조식(김해뉴스 2월 29일자 참조)의 사상을 이어받은 인물로, 실천적 지식인이었으며 김해의 의인이었다.

▲ 금방이라도 죽암의 글 읽는 소리가 들릴 것 같은 구천서원. 관리를 맡은 허주량 씨의 손길이 구석구석 닿아 있어 늘 정갈한 품위를 자아낸다. 박정훈 객원기자

허경윤은 1572년 김해부 대사동(현 봉황동)에서 태어났다. 가락국 허왕후의 후손으로 자는 사술(士述), 호는 죽암(竹庵)이다.
 
죽암은 품성과 재질이 뛰어났고, 순박했으며 모든 일에 정성을 다했다. 일곱 살 때 부친인 참봉(參奉) 허세절(許世節) 공에게 '사람의 도리'를 물어 학문을 닦는 이유를 알고자 했다. 부친이 "충효"라고 답하자 다시 무엇을 거쳐 충효에 이르는 지를 물었고 "배움"이란 답을 얻었다. 죽암은 충효의 도리를 알기 위해 배움을 청하였다. 부친은 어린 아들의 영민함에 크게 기뻐하며 '소학'을 익히게 했다.
 
임진왜란 당시 훼손 소식에 비분강개
노모 모시던 피란살이 접고 장정 100여명 모아 급히 귀향

왜란 평정 후 왕릉 재정비 청원
불탄 남명 학문 도량 산해정 대신 그 자리에 서원 세워 '신산' 사액


스무 살 되던 해에 임진왜란이 발발했고, 죽암은 노모와 함께 함양으로 피란을 떠났다. 먹을 것이 부족한 피란지에서 나물을 캐고 열매를 주워 음식이 끊이지 않도록 하며 노모를 모셨다. 그러던 중 왜적이 수로왕릉을 도굴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김해 허씨의 후손이자 김해부 사람이었던 죽암은 비분강개했다. 급히 100여 명의 장정들을 거느리고 김해로 돌아온 죽암은 파헤쳐진 수로왕릉의 봉분을 다시 쌓아올렸다. 김해허씨회현대종중 허선(72) 고문은 "죽암 어른이 아니었으면 오늘날 수로왕릉이 남아 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당시의 다급함을 설명했다.
 
▲ 죽암의 위패를 모신 사당 '상덕사'.
죽암은 체찰사(조선시대 전시 총사령관)을 겸하고 있던 우의정 이원익(李元翼)에게 청원, 조정에서 망제례를 지내도록 건의했다. 왜란이 평정된 후에는 김해로 돌아와 감사에게 청원, 수로왕릉을 다시 정비하도록 했다.
 
죽암이 조정에 올린 글 '청봉수납릉문'은 임진왜란 당시 수로왕릉의 모습을 짐작하게 한다. "지난 번 병화를 입었을 때 왕과 왕후의 능이 모두 왜병에 의해 파헤쳐지는 화를 입고 말았습니다. 차가운 구슬들이 여기저기 흩어졌고 금으로 만든 주발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졌으며, 갖가지 은제품도 먼지처럼 날아가 버렸고 옥으로 만든 기러기 또한 간 곳을 알 수 없습니다. 이마에 흥건한 땀이 날 정도로 비참했던 그 광경은 차마 다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죽암은 이 글을 통해 수로왕릉에 대한 국가적인 보호조치를 청원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남명이 학문을 닦았던 김해의 산해정(신산서원)도 불에 탔다. 산해정은 남명이 학문을 논하고 후학을 길러낸 곳으로, 사림의 구심점이었다. 남명의 학문세계를 따르던 죽암은 황세열·안희 등과 함께 부사 김진선의 협조를 받아 불타 버린 산해정 대신 서원을 그 자리에 세웠다. 1609년이었다. 서원은 같은 해에 '신산(新山)'이라고 사액되어, 선현을 배향하고 지방의 인재를 기르는 학문의 도량이 됐다.  

김굉필·정여창·이언적·조광조·이황
'동방오현' 문묘 배향 상소문
벼슬 마다하고 학문정진·후학양성

죽암의 인물됨을 높이 산 이원익은 여러 번 조정에 나오기를 청했다. 죽암은 순릉참봉(順陵參奉) 예빈시직장(禮賓寺直長) 등의 벼슬에 제수되었지만, 모두 사양한 채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매진하였다.
 
죽암은 이외에도 김굉필·정여창·이언적·조광조·이황을 '동방오현(우리나라의 다섯 분의 매우 뛰어난 현인)'으로 받들어 문묘에 배향해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문을 선조에게 올렸다. 선조는 죽암을 직접 불러 이를 윤허했다. 이 자리에서 죽암은 임금 앞에서 치르는 정시를 치러 합격했는데, 선조가 그 학문의 깊이를 크게 칭찬했다.
 
죽암은 예순을 넘어 1636년(인조 14년)에 또 한 번의 전쟁을 경험해야 했다. '병자호란'이다. 20만 대군을 거느린 청나라 태종의 말발굽 아래 조정은 힘없이 무너졌고,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란했다. 인조가 청병에게 포위됐다는 소식을 접한 죽암은 임금이 있는 서쪽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죽암은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하는 법인데, 이 어찌 살기를 도모할 때이냐"하며 전답을 모두 팔아 수백 석의 군량미를 모으는 한편 의병을 모집했다.
 
▲ 김해에 살고 있는 죽암의 12세손. 허선·허한주·허백·허주량·허모영 씨(왼쪽부터).
병자호란땐 전답 팔아 군량미 마련
아들·종질에 남한산성 진군 명령
청나라와 굴욕적 화약 소식에 망해정 아래 집 짓고 세상과 단절

이미 연로했던 죽암은 아들 빈(瀕)과 종질 연(演)에게 의병을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가라고 명했다. 죽암은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충성이 있는 곳에 효도가 있는 것이다. 늙은 아비를 염려하지 말고 길을 재촉하여 바로 올라가 남한산성의 위급함을 구하라"고 격려했다. 그러나 의병들이 문경새재에 이르렀을 때, 조정은 청나라와 굴욕적인 화약을 맺고 말았다. 아들과 종질이 이 소식을 가지고 김해로 돌아오자 죽암은 통곡을 하며 산으로 들어갔다. 망해정(현 봉황대 남쪽) 아래 작은 집을 지은 죽암은 매화와 대를 심고 호를 '죽암'이라 정함으로써 절개를 꺾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명나라가 청나라에게 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죽암은 '정매우감(庭梅寓感·뜨락의 매화에 느낌을 붙여)'라는 시를 짓기도 했다. "산 밖엔 모두 해가 바뀐 줄 모르고/ 사립문 세상 사람 보려 열지 않았다./ 뜨락에 매화나무 늙었으니 대명연호 쓴 지난 해 심은 거라 홀로 아끼지."
 
조선을 짓밟은 청나라가 흥한다는 소식을 듣고 비분강개해 이 시를 지은 것이다. 죽암은 이 시를 마지막으로 붓을 꺾고 더 이상 시를 쓰지 않았으며 밖으로 나오지도 않았다. 그로부터 3년 후 1946년, 죽암은 세상을 떠났다. 죽암은 상동면 우계리 중산 언덕에 묻혀 있고, 중산 아래에는 죽암의 위패를 모신 구천서원이 있다.

죽암과 구천서원
죽암 학문세계 '敬義' 비 세워

▲ 죽암의 학문세계를 담아, 구천서원 복원때 세운 '경의'비.
죽암의 위패를 모신 구천서원은 현재 상동면 우계리 중산 아래(우계리 811)에 있다. 1822년에 각 도의 유림 221명이 발의하여 김해부 서쪽의 거인리(현 내외동 중간)에 구천서원을 세우고 첫 번째 향사를 봉행했다. 이듬해에 거인리가 습지지대라 해서 다시 김해부 북쪽의 오리(현 구산1동) 허왕후릉 동남쪽의 평지로 서원을 옮겼다.

1995년 9월에 구천서원이 현재의 자리에 복원돼 오늘에 이른다. 구천서원의 뜰에는 죽암이 사랑했던 매화나무를 심어 그 뜻을 기렸다. 죽암의 학문세계를 새긴 '경의(敬義)'비도 세워졌다.
 
현재 종원 허주량(66)씨가 구천서원의 관리를 맡아 보고 있다. 구천서원에서 죽암의 의로움을 되돌아본 날에는, 죽암의 12세손인 김해의 원로 서예가 허한주(82·김해허씨회현대종중 종중), 허선(83·고문), 허백(72·종유사), 허모영(47·종원) 씨가 자리에 함께 하며 선조의 일을 들려주었다. 후손들은 '죽암집' '구천서원지'를 펴내 죽암이 남긴 글과 많은 일의 내력을 대대로 물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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