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Out of Africa)'를 본 많은 사람들이 남자 주인공 데니스가 카렌의 머리를 감겨주는 장면을 기억한다지만, 나는 데니스가 카렌에게 준 선물들이 더 기억에 남는다. 그 세 가지 선물은 만년필, 축음기, 그리고 나침반! 추억을 잊지 말라고 만년필을 주었고, 모차르트 음악을 항상 들으라고 축음기를 주었다. 그리고 방향을 잃지 않게 나침반을 주었다.
 
나는 내게 길을 잃지 않도록 나침반 역할을 해 준 책 한 권을 소개하려 하다. 우리 현대사는 1980년대를 변혁과 격동의 한 시기로 기록한다. 1980년대 후반에 대학을 다닌 사람들은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험난한 시대를 관통해야 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때 만난 책이 <통혁당 사건 무기수 신영복 편지 :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입시 위주 교육만 받다가 갑자기 맞닥뜨린 시대 상황 앞에서 혼란스러워 하던 나에게 그 책은 묵직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나는 이 책을 20대 중후반에 다시 만났다. 두 번째는 치기어린 감성이 아니라 차분한 마음으로 읽었다. 20대 초반에 내 마음을 뜨겁게 했던 책이, 두 번째는 세상과 사람에 대해 눈을 뜨게 해 주었다.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그들을 바라보게 한 것이다. 1985년 8월 28일 제수 씨에게 보낸 편지를 읽으면서, 나는 세상과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해야 하는지 배웠다.
 
"없는 사람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들은 없이 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여름의 징역은 자기의 바로 옆 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옆 사람을 단지 37도의 열 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미워한다는 사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미움 받는다는 사실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자기의 가장 가까운 사람을 향하여 키우는 '부당한 증오'는 비단 여름 잠자리에만 고유한 것이 아니라 없이 사는 사람들의 생활 도처에서 발견됩니다. 이를 두고 성급한 사람들은 없는 사람들의 도덕성 문제로 받아들여 그 인성을 탓하려 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오늘 내일 온다온다 하던 비 한 줄금 내리고 나면 노염도 더는 버티지 못할 줄 알고 있으며, 머지않아 조석의 추량은 우리들끼리 서로 키워 왔던 불행한 증오를 서서히 거두어 가고, 그 상처의 자리에서 이웃들의 '따뜻한 가슴'을 깨닫게 해줄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추수처럼 정갈하고 냉철한 인식을 일깨워 줄 것임을 또한 알고 있습니다."
 
나한테 큰 힘이자 지원군은 바로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인데, 저자의 편지 내용처럼 우리는 주위 사람을 시시때때로 탓한다. 저자는 당장은 힘들지만 우리 스스로가 시간의 흐름에 따르고 격한 감성을 이성적으로 해결하면서 사람의 따뜻한 감성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을 깨우쳐 주고 있다.
 
언론인을 꿈꾸었을 때, 방송인으로 10여 년을 살았을 때, 점자도서관에 낭독자원봉사를 갈 때, 선생으로서 학생들과 만날 때, 그 모든 시간 동안 이 나침반은 나에게 크게 작용했다. 세상과 사람을 향한 따뜻한 시선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만들어준 이 책의 첫 장을 다시 열고 닫으며, 내 나침반을 챙겨본다.


>>박지현 씨는
1970년 부산 출신. 부산KBS 리포터, 부산MBC 엠씨·아나운서, KNN아나운서 등으로 활동했다. 현대 인제대학교를 비롯, 경성대학교와 동서대학교 등에서 신문방송학을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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