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독립만세운동은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운동 초기, 조선의 유림들은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 그러나 조선의 선비들인 유림들에게 나라를 빼앗겼다는 사실은, 그 어느 누구보다도 엄청난 충격과 분노와 허탈감을 안겨주었다. 유림들은 한국의 독립의지를 밝힌 독립청원서를, 1919년 4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제출했다.
역사에서는 이를 '파리장서 독립운동'이라 부른다. 전국에서 유림 137인이 파리장서에 연서했다. 김해에서는 거인 류진옥(居仁 柳震玉. 1871~1928)과 법강 안효진이 대표로 참여했다.
거인 류진옥은 소눌 노상직(1885~1931·김해뉴스 2011년 12월 28일자 '김해인물열전'참조)문하에서 학문을 닦았으며, 일제의 압제 하에서 독립운동과 민족교육에 헌신한 절개 높은 김해 선비였다.

▲ 거인 류진옥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후학을 양성했던 강학당 '청산정'은 회현동 봉황대 언덕에 지금도 남아있다. 박정훈 객원기자 punglyu@hanmail.net

문화 류씨 일족 집성촌이었던 현재의 외동 해당 거인리 태생
14세 때 밀양의 소눌 문하서 학문

한일병합에 "문 밖 어디로 가랴"
파리 만국회의 독립청원서
김해 유림 대표해 안효진과 서명
고초 치른 후 재실 청산정 머물며 후학 교육에 남은 생 바쳐
1999년 대한민국 건국포장 추서

거인 류진옥은 1864년 6월 26일, 김해 거인리(현 외동)에서 류치영의 아들로 태어났다. 거인리는 문화 류씨의 세거지였다. 거인리에 터를 잡은 입향조는 17대조 류용(柳墉)이다. 외동 은하공원에는 그 역사를 전해주는 문화 류씨 세적비가 있다. 류용이 거인리에 자리를 잡으면서 심었다는 은행나무는 400여 년 수령으로, 현재 시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임진왜란 때 김해성에서 전사한 사충신 중 한 사람인 류식(김해뉴스 5월 2일자 '김해인물열전' 참조)이 류용의 손자이다. 류씨 문중이 살았던 거인리는 '머물 거(居)'에 '어질 인(仁)'을 쓰고 있으니, '인자한 이가 사는 마을'이라는 의미이다. 류진옥은 자신의 호를 '거인'이라 하여 선대의 뜻과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을 담았다.
 
류진옥은 어려서부터 조용하고 차분해 또래들이 함부로 장난을 걸지 못했다. 기질이 총명하여 한 번 배우고 익힌 것을 잊지 않아 가문의 어른들이 "이 아이가 뒷날 우리 가문을 창성하게 하겠다"고 감탄했다고 한다.
 
류진옥은 시와 글을 많이 남겼는데, <소학>을 배울 때의 마음을 한시로 이렇게 표현했다. "학문 익힘은 나는 새처럼 날갯짓 익혀야지 / 사람 만들기는 매미 허물 벗는 것 같지. / 가슴에 느껴져야 善性(선성)이 되살아나니 / 배움의 바다에 虛靈(허령·잡된 생각이 없이 마음이 신령함)한 배를 띄워보세." 학문 익히는 일을 새가 날갯짓을 익혀야 날 수 있음에 빗대어 표현했는데, 공부가 사람에게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이다.
 
▲ 외동 은하공원에 있는 은행나무와 문화류씨세적비.
<대학>을 읽는 마음은 이러했다. "책 속에 성인 상대해 明德(명덕·밝고 도리에 맞는 행동) 닦으려니 / 낮을 이어 밤 없애도 즐거움 끝 없네. / 다만 학문에는 다른 길 없음 알았으니 / 가장 마음 다짐해 용두사미 경계할 일. / 뜻을 알면 모든 사욕 끊이고 / 마음 기틀 알면 모든 이치 통하네. / 마음 잡기 여기에 실수 없다면 / 아마 성인들과 심경이 같아지리." 학문을 닦는 데 있어 삿된 마음을 갖지 않겠다는 말이다.
 
류진옥은 14살 때 경남 밀양에 있던 소눌 노상직 문하에 들어갔다. 소눌이 자암서당에서 <대학>을 강의하며 "격물, 치지, 성의, 정심보다 더 절실한 것은 없다"고 학문의 요지를 설명하자, 이를 자신의 덕을 진보시키는 기반으로 삼았다.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는 대학의 8조목으로 가장 중요한 개념이다.
 
1910년, 일제의 강압으로 나라가 주도권을 잃고 강제 합병되자 류진옥은 비분강개한 가운데 "문을 나서면 내 어디로 가랴"라며 문을 닫아걸고 일본인이 관여하는 어떤 일에도 가담하지 않았다. 이처럼 망국의 한을 품고 있던 중 1919년 곽종석 (1864~1919·유학자, 독립운동가)과 김창숙(1879~1962·유학자, 독립운동가) 등을 중심으로 유림들이 파리장서에 서명하는 일이 일어났다. 류진옥은 스승 소눌, 평소 교분이 두터웠던 법강 안효진 등과 함께 서명했다. 목숨을 걸고 김해유림을 대표해 파리장서에 서명한 이는 거인 류진옥과 법강 안효진 두 사람 뿐이다. 이 거사는 전국의 유림 137명이 참가한 '유림항일운동'이었다.
 
파리장서는 일제의 침략상과 한국의 피해 실정을 밝힌, 1천420자에 달하는 장문의 글이다. 글은 곽종석이 지었다. 김창숙이 전국의 유림들에게 연락해 서명을 받고 경비를 마련한 뒤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다. 중국어와 영어로 번역된 파리장서는 신한청년당의 대표로 파리에 파견된 김규식(金奎植·1881~1950·독립운동가, 정치가)을 통해 만국평화회의에 제출됐다. 중국과 일본의 언론기관에도 발송하여 국제여론을 환기시키고 우리나라의 독립의지를 온 세계에 공표했다. 또한 전국의 각 향교에도 우송되어 유림을 중심으로 한 지역민들의 독립심을 고취했다.
 
이 거사는 그해 4월 12일 서명자의 한 사람이었던 송회근(宋晦根·1877∼?·독립운동가)이 경북 상주의 만세운동과 관련해 일본경찰에 붙잡히면서 발각되었다. 이로써 류진옥도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일제는 유림들이 존경받는 인물들이었음을 감안, 민족적 감정이 확산될 것을 우려해 크게 부각시키지는 않았다.
 
▲ 1999년 정부에서 건국포장을 추서한 포장증.
이런 가운데, 일본경찰의 감시는 류진옥과 가족들을 떠나지 않았다. 감시가 너무 심해 모든 활동에 제약이 따르자 류진옥은 두문불출했다. 가정 형편도 어려워져, 류진옥은 친척인 허씨 문중에서 빌려준 재실 '청산정(靑山亭, 회현동 봉황대 언덕에 위치)'에 머물렀다. 이 재실은 한때 '춘산정'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김해뉴스>는 김해허씨 문중을 통해 회현동에 있었던 재실은 '청산정'이 유일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당호의 '청(靑)'자가 '춘(春)'으로 잘못 읽힌 탓으로 짐작된다. 지금은 '화수정(花樹亭)'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는 경주이씨 문중 소유이다.
 
류진옥은 '청산정'에서 후진교육에 매진했다. '청산정'은 김해의 선비가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김해의 젊은 청년들을 가르친 강학당이 됐다. 후학을 가르치는 한편 류진옥은 자신의 시와 글을 모은 <거인유고>와 선대의 글을 모은 <만사유고> 등의 저서를 집필했다.
 
류진옥은 1928년 10월 20일, 지병 탓에 청산정에서 5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999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서울에 사는 증손자 류구현(56) 씨는 "임진왜란 당시 류식 공이 김해성에서 왜군과 싸우다 순절하셨고, 증조부님은 목숨을 걸고 파리장서에 연명하셨다. 조상 대대로 항일정신이 면면히 이어져 온 것이다. <김해뉴스>에서 증조부님을 소개한다니 반갑고 고맙다. 가야의 고도인 김해에서 류식, 류진옥 할아버지의 높은 정신을 널리 알려준다면, 후대 사람들이 본받을 표상이 되리라 생각한다"며 "김해출신 인물들의 이야기가 한데 모여 문화콘텐츠가 된다면, 김해 시민들의 자긍심이 높아지고 시민의식을 함양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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