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민기 문학박사·문학평론가
차민기 문학박사·문학평론가

짐 캐리 주연의 영화 <트루먼 쇼>(1998년 개봉)는 영화사 100년에 손꼽을 만한 작품으로 남았다. 코믹스러운 짐 캐리의 다채로운 표정 끝에 드러나는 가공의 현실 앞에서, 수많은 사람들은 슬픔과 공포를 동시에 느꼈다. 소소한 일상에 설레고 누군가의 죽음을 슬퍼하기도 하던 트루먼의 일상이, 실제로는 거대한 세트 장 안에서 이루어진 각본의 결과였다는 사실에 많은 사람들은 허탈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럼에도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안정이 보장된 세트장 안의 삶을 거부하고 과감히 세트장 밖의 불확실한 삶을 선택하는 트루먼에게서, 우리는 누구에게도 규정되지 않는 주체적 존재로서의 대리만족을 느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 다음 해에 개봉된 영화 <매트릭스>(1999년 개봉)는 파격적인 카메라 연출 기법과 CG가 접목된 화려한 영상으로 눈길을 끌었지만, 그보다는 현실과 가상의 경계에서 관객들로 하여금 일순 갈피를 잃게 만드는 혼돈의 발상이 더 많은 얘깃거리를 만들었다. 극중 선구자 역의 모피어스가 내미는 '빨간 약(현실 각성)'과 '파란 약(현실 안주)'의 선택권 앞에서, '인간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 것인가' 하는 철학적 물음은, 당시 학계에 논문 주제로까지 등장했고 한동안 대입 논술 주제로까지 다루어지기도 했다.

화면 구현에서 큰 차이를 보였던 두 영화지만 이 두 영화가 던진 화두는 결국, '인간은 무엇인가?', 혹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하는 존재론적 물음이었다. 영화 속의 '가상세계'는 안정적이지만 인간의 주체성이 거세된 공간이다. 반면 '현실세계'는 불안정과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만 인간의 주체성이 회복되는 공간이다. 이 두 영화 속 인물들은, 현실을 적극 개선하려는 모습을 통해 주체적 삶의 의지가 인간의 존재론적 이유임을 보여주고 있다.

최근 '메타버스'와 관련한 문화가 삶의 전반으로 번져가고 있다. 메타버스는 '가공'이라는 뜻의 '메타(Meta)'와 현실세계를 뜻하는 '유니버스(Universe)'가 합쳐진 말이다. 이전의 가상현실(VR, Virtual Reality)이나 증강현실(AR, Augmented Reality) 들은 현실 속에 가상의 콘텐츠를 보태어 현실을 보다 확장해 가는 것이었다면, 최근 유행하는 메타버스는 현실과 확연히 분리되는 또 하나의 세계를 아예 창조하는 일이다. '로지(한국)', '김래아(한국)', '릴 미켈라(미국)', '버뮤다(미국)', '슈듀(영국)', '이마(일본)' 들과 같은 가상인물들은 모두 메타버스 속에 존재하는 인물들이다. 이들은 수 만 명의 SNS팔로워를 거느리며 엔터테인먼트 산업과 각종 브랜드 모델로 활약 중이다. 미국의 '릴 미켈라'는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의 협찬을 받으며 지난 한 해 130억 원에 이르는 수익을 올리기도 했다. 

이처럼 메타버스 콘텐츠들은 실재를 확장,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실재를 대체하는 것들이다. 기업들이 메타버스 콘텐츠들을 적극 활용하는 이유는 실제 세계에 존재하는 여러 위험 요소들에 대한 우려를 애초에 불식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들이 메타버스를 즐기는 이유도 현실의 자아와는 전혀 다른 '부캐'를 활용해 가상 속에서 새로운 존재로서의 삶을 누리기 위함이다. 그래서 대개의 부캐들은 현실의 자아와 완전 반대인 경우가 많다. 복잡하고 피곤한 사회관계를 피해 오로지 혼자만의 세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삶. 그러나 메타버스에서 한참을 즐기다가 현실로 돌아왔을 때, 다시 마주하는 그 현실이 개선되지 않은 채 그대로라면 우리는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이런 점에서 메타버스의 무분별한 확장은 가상으로의 무책임한 도피 행각일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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