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9일은 우리 민족사의 가장 빛나는 문화유산 중 하나인 한글 창제를 기념하는 뜻깊은 날이다. 
우리 민족은 일제의 서슬퍼런 탄압이 자행되던 일제시대 당시 조선어연구회를 중심으로 한글날을 기념하기 시작했다. 
<김해뉴스>는 575돌 한글날을 맞아 이번 지면에 김해가 낳은 최고의 한글 학자인 눈뫼 허웅 선생의 발자취를 돌아보는 특집 기사를 싣는다. 
아울러 국내 최초 공립 한글박물관으로 주목받고 있는 김해한글박물관 개관 진행사항을 알아봤다. <편집자 주>

 

눈뫼 허웅 선생은 “나랏말은 정신이자 겨레문화의 문화의 원동력”이라며 국어 연구를 민족문화적 관점에서 강조했다. 김해뉴스DB
눈뫼 허웅 선생은 “나랏말은 정신이자 겨레문화의 문화의 원동력”이라며 국어 연구를 민족문화적 관점에서 강조했다. 김해뉴스DB

 

1918년 김해 동상동에서 출생
연희전문학교서 한글 수학·연구
비밀독서모임 이끌며 한글 지켜

광복 후 고향 김해서 한글 가르쳐
서른 나이엔 부산대 교수로 교편
성균관·연대·서울대 교수 재직
국어를 언어과학 수준으로 올려

한글날 공휴일 폐지 반대운동
한글학회 주도·한글전용론 주장


눈뫼 허웅 선생(1918~2004)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언어학자이자 국어학자로 평생을 한글 연구에 헌신한 인물이다. 허웅 선생은 생전에 "한 나라의 말은 그 나라의 정신이며, 그 겨레 문화 창조의 운동력이다"며 국어연구를 민족 문화적 관점에서 강조했다. 이런 생각은 선생의 학문의 바탕이 됐으며 평생 일관되게 유지된 학문적 태도이기도 했다.
 
허웅 선생은 김해 동상동 965번지에서 1918년 7월 26일, 부친 허수 모친 윤영순의 5남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김해보통학교(현 김해동광초등학교. 23회)를 졸업한 허웅 선생은 생전에 여러 매체에서 고향 김해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1979년 4월 2일자 농민신문에서는 선생의 이런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신문에서 그는 "나는 내 고향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자랐다. 무슨 자랑거리가 있느냐고 반문할 사람이 많으리라 생각되나, 첫째 자랑거리는 거기가 옛 서울이라는 것, 그래서 김수로왕의 왕릉이 읍내 한가운데 있고, 북으로는 허왕후의 왕릉이 있다는 것이다. 김해 주변의 다른 고을 어디에 이런 자랑거리가 있을까? 다음으로 자랑이 된다고 생각한 것은 김해평야다. 그 넓은 김해평야에 누른 벼가 익어 갈 때면, 나는 만장대에 올라 그 금빛 벼바다를 내려다보며 그 사이를 누비고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 줄기에 내 어린 낭만을 적셔보기도 했다"고 회상한다.
 
낙동강 줄기에 낭만을 적셔 보던 소년 허웅은 동래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동래고보 시절에는 럭비와 축구선수로 활동할 만큼 활발하고 건강했지만 2학년 때 폐결핵으로 1년간 휴학했다. 김해 집에 돌아온 그는 건강을 회복한 뒤 3학년에 복학하면서 국어공부를 하기로 결심했다.
 
선생이 동래고보에 재학하던 시절, 교사들은 우수한 제자인 허웅을 동경제국대학 진학의 수순으로 동경제일고등학교 입학을 추천하려 했다. 그러나 허웅 선생은 이를 마다하고 외솔 최현배 선생이 재직하던 연희전문학교 진학을 선택했다. 한글을 배우고 연구하기 위해서였다. 1938년, 선생의 나이 열여덟이었다.
 

한글학회 회관 건립 기념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는 허웅 선생.
한글학회 회관 건립 기념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는 허웅 선생.

 

 
일제의 핍박이 날로 심해지던 시절, 선생은 오직 한글을 생각하는 삶을 선택했다. 외솔의 '우리 말본'을 읽었고, 학우들과 비밀독서모임을 이끌면서 항일 의지를 키웠다. 
 
연희전문에 입학한 다음 해 외솔이 일제의 압력으로 교수직에서 파직되고 일본 경찰에 체포되자 선생은 혼자 공부하기로 결심하고, 1940년 학교를 중퇴했다. 이때부터 선생은 독학으로 15세기 국어를 연구하며 세계의 저명한 언어학 이론을 공부했다. 8·15광복과 동시에 고향 김해에서 한글강습소를 열어 우리말과 우리글을 보급하기 시작했다.
 
선생은 1947년 9월 서른 살의 나이에 대학 교수가 되었다. 부산대학교 교수로 출발하여 성균관대학교 연세대학교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선생은 한글을 언어과학적으로 분석·연구하여, 세계의 그 어떤 문자보다 한글이 우수함을 알렸다. 그래서인지 허웅 선생의 업적과 이름은 국내에서보다 세계의 언어학자들에게 더 높이 인정받고 있다. 
 
학자들은 자주·자립적 국어학의 초석을 놓은 주시경과 국어문법의 체계를 세우고 애국적 계몽주의 국어학을 확립한 최현배에 이어 허웅 선생을 '국어학을 언어과학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학자'로 평가하고 있다.
 
허웅 선생은 "한글은 우리 겨레와 민중을 위한 글자로 태어난 것이다"며 "우리 말글과 문화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는 것에서 나아가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선생은 수십 권의 저서를 출간했다. 국내 최초로 음운학의 공시적·통시적 체계를 세운 '국어음운론'(1958), 최초의 언어학 개론서인 '언어학개론'(1963), 15세기 국어문법을 서술한 '우리옛말본'(1975), '국어학-우리말의 오늘, 어제'(1983), '20세기 우리말의 통어론'(1999) 등 지금도 후학들에게 보배롭게 읽히고 연구되고 있는 책들이 많다.
 
선생은 연구와 저술에도 전심전력을 다하였지만, 훌륭한 후학들을 길러냈다. 전국 각지에 흩어져서 한글을 연구하는 학자들 중에서 허웅 선생의 제자, 제자의 제자가 아닌 이를 찾기가 더 힘들 것이다. 선생은 삼십여 년 간 한글학회를 이끌며 반석에 올려놓았고, 한글전용론을 주장하고, 한글날 공휴일 폐지 반대운동을 펼치는 등 평생을 한글연구와 보급에 힘썼다.
 
지병으로 서울대병원에서 수술을 받았을 때도 한글학회 사업을 챙길 정도로, 선생은 마지막까지 한글을 붙잡고 놓지 않았다. 눈뫼 허웅 선생은 이 땅에 와서 돌아가시는 날까지 오롯이, 우리말과 글을 위해 살다 간 높고 큰 산이었다.
 
생전에 외솔상(1973), 국민훈장 모란장(1973), 성곡학술문화상(1986), 세종문화상(1990), 주시경학술상(1993), 세종성왕 대상(1998) 등을 받았고, 2004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정리 = 김해뉴스 송희영 기자 editor@gimha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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