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평래 이사장의 청년 시절은 격정의 세월이었다. 의사가 되고부터는 열정의 시간을 보냈다. '시간을 낭비하는 사람이 제일 불쌍하다'고 말하는 조 이사장은 여전히 흰 가운을 입고 청진기를 든 현역이다. 그의 꿈은 아직 진행형이다.
철학을 좋아하는 청년이 있었다. 그는 <자본론>을 읽다가 감옥에 갔다. 영어 생활 탓에 체제와 세상에 굴복할 만도 하건만 청년은 '제대로 더 공부해야겠다'고 주먹을 쥐었다.
 
한 청년의사가 있었다. 평생 인술을 실천한 스승한테서 배운 의술을 서민과 약자들에게 베풀고 싶었다. 도심과 번화가가 아닌 인적 드문 섬 한쪽에 병원을 세우고 싶었다.
 
한 사내가 있었다. 시대정신이 부여한 소명을 버리지 않고, 성취에 안주하지 않으면서 항상 겸손한 태도와 낮은 자세로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왔다. 이 모두가 해동병원 조평래(78) 이사장의 이력이다. 반평생을 부산 영도 땅에서 살았지만, 그는 김해 한림면 안곡리 출신의 의료인이다. 조 이사장을 만나 고향 김해와 의사의 인생 등을 들어봤다.
 
- 고향 얘기를 들려주시겠습니까
 
▶한림면 안곡리에서 태어났어. 아버지 조금석은 일제시대 때 오사카상업학교를 다니다 항일운동을 위해 중국 상하이로 갔지. 운동 시작하자마자 해방이 돼 고향으로 내려왔어. 독립운동 때문에 살림이 쪼들렸고, 결국 부친은 부산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어. 나는 이북초등학교를 졸업했는데, 성적이 우수해서 교장 추천으로 부산사범학교에 입학했어. 신동은 무슨? 오히려, 별나다는 말을 많이 들었지. 초등학교 졸업 후 부산으로 갔기 때문에 고향에서는 방학 때 논 기억밖에 없어. 어릴 적 친구들이 10여 명 되는데 두 달에 한 번꼴로 만나. 초등학교 때 담임교사가 친일 한국인 교사였어. 겨울철 언 땅 위에 맨발로 서서 조회를 하는데, 움직인다고 엉덩이를 차더군. 어린 마음에 가슴 아픈 사건이었어.

- 고향엔 자주 가십니까
 
▶사촌들이 집을 관리하고 있어서 자주 들르는 편이지. 명절 때는 어르신들을 위해 음식을 준비해서 마을회관에서 잔치를 벌이기도 해. 안곡리에 살때 삼계고개를 넘어 김해 5일장에 놀러 가곤 했지. 그때 삼촌이 사준 장터 소고기 국밥은 지금도 그 맛을 잊을 수 없어. 지난 번에 갔을 때 경전철이 달리는 모습을 봤어. 김해가 소도시인 줄 알았는데 대도시 같은 분위기가 느껴지더라고, 격세지감이었지.

- 70대 후반답지 않게 정력적으로 보입니다
 
▶여전히 진료를 보니까 건강한 것 아닌가? 만날 시간에 쫓기다 보니 보약 먹을 시간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어. 골프와 테니스는 어릴 때 한림면 산에서 자치기로 마스터 했어.(웃음) 대신 금정산이나 양산 일대 산에 자주 가. 영도 봉래산에도 전엔 갔는데 아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지금은 안 가.

- 사범학교를 나온 걸로 알고 있습니다
 
▶현재 부산교대 전신이 부산사범학교야. 사범학교 졸업 뒤 4년 정도 교편을 잡았어. 능력 있고 머리 좋은 애들이 가정이 어려워서 진학하지 못하는 현실을 보고, 교직 생활로는 이런 처지의 얘들을 도울 수 없겠다는 생각을 했어. 1972년 '해동장학회'를 만들 때도 그 시절의 기억이 작용한 것 같아.
 
조 이사장이 설립한 '해동장학회'는 매년 30명 가까이 되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한다. 현재까지 700여 명의 장학생이 배출됐다. 장학회 출신 회원들이 십시일반으로 성금을 내 장학회가 잘 굴러가고 있다. 장학생들이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명단과 액수를 공개하지 않는 게 원칙이다. 보이지 않게 돕자는 이유에서다.
 
- 부산대에도 다니셨더군요
 
▶부산대 문리대 철학과에 시험을 쳐서 입학했어. 어렸을 때부터 문학과 철학 공부를 하고 싶었어. 그러다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다가 경찰한테 붙잡혀 감옥에 갔지. 불온도서를 읽었다는 이유로 부산지법에서 3년형을 선고받았어. 2년 6개월쯤 복역했지. 대구고법에서 항소심이 있었어. 진주사범학교 출신인 부장판사가 대학생들에게 호의적이었어. 형량이 줄어 출소했지.
 
조 이사장은 당시 <자본론> 등을 일본어와 영어로 읽었다. 그가 느낀 자본론의 요체는 무엇일까? 조 이사장은 "마르크스가 말하는 건 불평등 없는 자본주의가 진짜라는 거야"라고 말했다.
 
- 감옥에서 반성(?)은 좀 했습니까
 
▶(웃음)반성보다는 더 깊이 있게 철저히 철학, 문학을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오로지 책만 봤어. 트럭 2대 분량의 책을 갖고 있었거든. 돈만 생기면 보수동 등에서 책을 샀어. 홍명희, 김기진, 이태준 씨의 글을 좋아했어. 읽을 수록 재미가 있었고, 읽은만큼 써댔지. 친구들이 "일기 쓰지 마라. 경찰한테 빌미를 주는 증빙 서류가 된다"고 걱정을 해줬어. 그 말 듣고 싹 없애버렸지.(웃음)

- 수사기관의 주목을 받지는 않았습니까
 
▶4.19운동의 주범을 찾느라 경찰들이 많이 설쳐댔지. 당시에는 부산에 제대로 된 청년단체가 없었어. 뜻맞는 선·후배들이 민민청(민주주의민족청년동맹)을 조직했어. 학원부장을 맡으면서 이름도 '조삼'으로 바꿨어. 한때 수사기관이 '조삼이 도대체 누구냐?'며 이 잡듯이 잡으러 다니기도 했지.

- 의대에는 왜 갔습니까
 
▶철학과 2년을 다니다 3학년 때 의대 본과 1년으로 전과했어. 당시에는 주임 교수가 추천하면 가능했지. 문학과 철학을 좋아했지만 이 분야 출신들이 사회생활에서 어려움을 겪더라고. 자기 전공 공부만 하면 생활에 여유가 없겠더라고. 21세기가 다가오는데, 개인에게 맞는 직업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어. 또 수사기관의 추적과 추궁이 덜한 전공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더라고.

- 이후 생활은 괜찮았습니까
 
▶대학에서 일반외과를 전공했어. 당시에는 의사가 되려면 일반외과를 해야 한다고 할 정도로 의료계의 엘리트들이 가는 분야였지. 요즘은 반대로 피부과나 정신과가 인기가 있지. 걱정이야. 진짜 수술하는 외과의가 줄어들어서.

- 장기려 박사와 인연이 있다구요
 
▶은사님이야. 그분은 수업 끝나면 자기 방에 들러서 가라고 하더라고. 이유 없이 끌렸고, 실수를 해도 나무라질 않아 왠지 모르게 정이 들었지. 박사님은 '닥터 조는 나랑 일해야 해, 개업하지 마'라고 자주 말씀하셨어. 우여곡절 끝에 해동병원을 개업하니까 장 박사가 미국 GE사의 발전기를 사오셨어. 지금도 쓰고 있다네. 장 박사는 발전기를 주면서 "병원을 하다 어려우면 다시 내 옆으로 돌아오라"고 하셨지. 장 박사와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만들었어. 지금은 청십자요양병원으로 바뀌었지. 그때로서 선각자적인 일을 한 셈이지.

- 해동병원은 언제 세웠습니까
 
▶부산대병원에 있다가 영도에 있던 침례병원에서 일했어. 침례병원 있을 때 보니 영도는 한산한 섬이지만 한국전쟁 이후 피란민들 그러니까 없이 사는 사람들이 많았어. 개업을 하려는데 돈이 있어야지. 당시 재야 정치의 대부 예춘호 씨와 동명목재 강석진 회장을 만났어. 예 씨는 강 회장이 제일 존경하는 정치인이었거든. 대뜸 강 회장이 300만 원을 빌려주더라고. 1966년 그 돈으로 기와집을 전세 내 병원을 차렸어.

- 해동병원은 '환자 중심' 병원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개업할 때만 해도 영도는 못 사는 사람들 천지였어. 병원비가 없는 사람이 부지기수였지. 아픈 사람 오면 치료부터 하고 '돈이 생기면 나중에 오라'며 보냈지. 영도 사람들한테 '돈 없으면 조 원장한테 말하면 된다'는 소문이 번졌지. 신문·TV광고는 엄두도 못낼 시절이었는데 소문으로 병원이 홍보된 셈이야.

- 해동병원 밥맛도 유명합니다
 
▶쌀을 농협에서 직거래로 사와. 일등품이지. 부식은 김해에서 가져다 써. 병원 옥상에 김해산 콩으로 쑨 메주와 장독이 있어. 좋은 재료, 국산 재료를 쓰니 환자와 보호자들도 '병원 밥맛이 전국 최고'라고 말하더군.

- 앞으로의 병원 운영 방향은
 
▶사회가 밝아지고 국민 의식 수준이 향상되면 의료 혜택이 국민에게 고루 돌아가야 해. 의식주와 함께 질병으로부터의 자유가 이뤄진 세상이 좋은 세상이야. 현재 병원에서 사회복지 관련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는데 해동장학회와 함께 시너지 효과를 내는 방안을 고민하고 있어.
 
인터뷰는 조 이사장의 인생역정과 병원 경영 등을 돌아 다소 껄끄러운 정치 분야에 이르렀다. 그의 답변은 단호했고 군더더기가 없었다.
 
- 어찌 보면 부산지역 1세대 재야 진보운동을 한 셈인데, 그런 측면에서 요즘 정치, 어떻게 보십니까
 
▶고 노무현 전 대통령도 같은 고향 출신이라고 날 따랐지. 국회의원에 출마할 때 '우야면 좋겠습니꺼?'라며 진료실을 찾아오기도 했어. 지금 민주통합당의 문재인 의원도 자주 왔었지. 야권인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은 지금 모습으로는 안돼. 좀더 양심적이고 민주·민족적인 진영의 사람들을 포용하는 당이 되면 좋겠어. 어려운 사람들의 고충을 해결하는 데 앞장서야 해. 자기들의 정치적인 입지만 고집하지 말고.

- 안철수 현상은 어떻게 보십니까
 
▶현 정부는 통치철학이 없어. 대통령이 서울시장 시절과 국정을 혼동하는 것 같아. 21세기는 개방사회야. 모든 국민이 개성을 살리고, 그런 점들이 모여 사회에 기여하는 분위기가 중요해. 안철수 원장이 박원순 서울시장, 박경철 외과의사와 손을 잡은 것 같더라고. 생각들은 건전하지만, 아직 대중화되지 않았어. 대중화되기에도 어려운 점이 많을 거야. 내가 운동하던 시절에는 법대, 의대생들이 앞장섰어. 요즘은 이 친구들이 출세주의자로 변한 것 같아. 젊은이들이 답답해하는 점을 풀어줘야 해. 그들이 오갈 데가 없는 게 문제야. 일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되면 청년문제가 많이 해결될 거야. 기성세대한테 분명히 책임이 있는 거지.
 
조 이사장의 좌우명은 '성실하고 남한테 미움받지 말고, 남모르게 도와주자'는 것이다. 불교, 유교에도 밝고 3년간 일요일 오전마다 설교할 정도로 성경에도 밝다. 일본어와 영어로 읽고 말하고 요즘에는 중국어를 독학한다. 중국인과 중국문화를 알려면 언어를 알아야 한다는 뜻에서다.
 
- 끊임없이 뭔가를 추구하는 것 같습니다
 
▶내 개성이 원래 그래. 뭔가 새로운 것을 알려고 하는 욕심이 있어. 병원 스태프 회의나 연설 때 그런 말을 해. '항상 창의적인 개발을 해서 계발한 창의력을 생활화 하라. 그것이 없으면 21세기를 살아갈 수 없다. 21세기는 경쟁 사회다. 경쟁은 특성 없이는 존립이 안 된다.' 듣는 사람들이 어리둥절해 하면 '책을 보라, 거기에 길이 있다'고 한 마디 하지. 책 볼 시간? 자기 노력에 달렸어. 학교 다닐 때부터 3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어. 점심 먹고 30~40분 자는 걸로 수면을 채우지. 퇴근해서 저녁 뉴스보고 새벽 2시까지 책을 읽어. 피곤? 굳어진 습관에 그럴 겨를도 없는 것 같아. 내가 제일 불쌍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시간을 낭비하는 사람'이야. 자식들한테도 내가 몸소 보여주지.
 
조 이사장은 의사를 '천직'으로 받아들였다.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가겠다고 서슴없이 말하는 사람에게 '살면서 후회는 없었느냐'는 질문은 부질없는 것이었다. 인터뷰 중간중간에 전화로 걸려온 '문진 민원'에 조 이사장은 친절하게 또박또박 답을 해줬다.
 
"김해 사람들이 좀 특별해. 앞으로 <김해뉴스>가 할 일이 많을 거야. <김해뉴스>가 더 보람있는 보도를 할 수 있도록 분발하면 좋겠어."


※조평래 이사장은
1934년에 태어났다. 부산대 의대를 졸업했고 해동병원을 설립했다. 부산교대 총동창회 회장, 요산문학상 운영위원, 부산시교육위원회 초대 의장을 역임했다. 현 대한병원협회 이사, 한국 병원협동조합 부회장, 전국중소병원협의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지난 1990년 부산시의 '자랑스러운 시민상' 본상을 수상했다. 부인 박은주 여사 사이에 1남 3녀를 뒀다. 큰 사위는 김창수 해동병원장, 둘째 사위는 김정일 부산대 정형외과 교수이다. 아들 조형섭 씨는 해동병원 기획실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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