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마 갈아타던 곳으로 관사 있었던 곳
인근 용전숲 옛 생법역 흔적도 아련


진례면 서부로에서 관동교를 건너면 관동(官洞)마을이 나온다. 이곳은 오래 전에 역마를 갈아타는 곳인 역의 관리와 역졸들의 관사가 있었던 곳이라고도 하고, 벼슬아치들이 살던 곳이라고도 한다.
 
관동마을 인근에는 용전숲이 있다. <김해뉴스> 62호에서도 소개했지만, 용전숲은 진례면에서 창원으로 넘어가는 길목으로, 말을 매어두고 쉬어가던 생법역이었다. 이런 이유로 관동마을 입구 일대에서는 관장터라고 해서 주막거리와 5일장 등이 열렸고, 사람들로 붐볐다고 한다. 지금은 그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 지금은 번성했던 옛 시절을 추억으로만 간직하고 있는 관동마을의 전경.

마을 안으로 들어서면 마을 입구에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당산나무다. 원래의 당산나무는 1959년의 사라호 태풍 때 뽑혀나가 버렸다. 그러나 그 당산나무의 기운이 남아 있다고 믿은 마을 주민들은 같은 자리에 팽나무를 심었다. 오래된 나무는 아니지만, 하늘을 향해 팔을 쭉 뻗은 자태가 제법 근엄하다.
 
다리미 모양 마을 둘러쌌던 대나무숲
공동우물 3곳 등도 역사에 묻혀 흔적만
물 맑은 고장 자랑하듯 가재골 명성
복개한 마을 하천 아직도 빨래터 사용


마을 주민들에 의하면 관동마을은 '다리미'처럼 생겼다. 요즘의 전기다리미처럼 한쪽이 뾰족한 다리미가 아니라, 숯불에 달궈 사용했던 동그란 모양의 구식 다리미다. "40년 전까지만 해도 '다리미'처럼 동그랗게 생긴 마을의 주변으로 대나무 밭이 형성돼 있었어요. 신월리 쪽에서 보면 우리 마을은 입구만 보일 정도로 울창했죠. 지금은 대나무들이 대부분 없어졌지만." 관동마을 김을남(60) 이장이 말했다.
 
관동마을에는 현재 26가구 50여 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공부하는 청소년들이라곤 초등학생 2명밖에 없어 귀한 대접을 받고 있다.
 
관동마을에서는 보리나 벼농사를 주로 짓고 있는데, 일조량이 적어 농사 짓는 일이 수월치가 않다고 한다.
 
▲ 복개된 하천은 그러나 지금도 마을주민들의 빨래터로 사용되고 있다.
둘러보니 마을 한 가운데로 하천이 흐르는데, 복개를 했지만 부분적으로는 하천을 쓸 수 있도록 틔워 놓았다. 이곳은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기도 하고 주민들의 빨래터로 쓰이기도 한다. 물은 투명하고 맑다. 아닌 게 아니라, 마을 뒤쪽에는 돌을 들어올리면 어김없이 가재가 보인다는 가재골이 있다. 마을 일대의 수질이나 환경이 양호하다는 사실을 웅변하는 대목이다.
 
마을 안쪽으로 더 들어가면 용지봉 줄기가 보인다. 이곳에는 천지개벽 때 논고동이 있었다는 전설의 고동바위가 있다. 바위는 짚 멍석 2장 정도를 깔 수 있는 크기이다.
 
마을에는 삼각형 모양의 우물이 3개 있었다. 그러나 공동우물에서 물을 길어 나르는 일이 힘에 겨워지자 1960년대 즈음해서 집집마다 우물을 만들었다. 관동마을은 물이 많은 곳이다. 어느 곳이든 파기만 하면 물이 나왔다. 그 뒤로는 20여 년 동안 집집마다 자신들의 우물을 사용했다.
 
마을회관에 모인 관동마을 어르신들은 옛 이야기를 펼쳐놓았다. 그 이야기는 주로 없이 살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석유가 없었던 탓에 '광솔'이라 해서 송진이 붙어있는 소나무 가지를 이용해 불을 붙였다, 시래기 죽, 쑥 죽, 밀을 갈아 만든 죽 등을 주로 먹었다, 소나무 새순이 뿔처럼 자라면 그걸 잘라내서 껍질을 벗겨 씹어 먹었는데 그걸 '송구'라 불렀다, 어머니들이 산에 나물을 캐러 가면 집에 남게 된 아이들은 울었는데 그러면 어머니는 "송구 뿔라(부러뜨려) 올게"라며 아이들을 달래곤 했다, 산에서 나무를 한 짐 했을 때는 왕복 6시간 거리의 내외동 시장에 나가 고구마와 맞바꿔 왔다….
 
이 마을에는 50년 전만 해도 서당이 있었다. '동사' 또는 '집회소'라 불렸던 옛 마을회관이 있던 자리가 바로 서당 자리였다. "6·25 전쟁이 나 학교엘 못갔지. 관동마을에 있던 서당엘 다녔는데 훈장이 장척이라고 하는 긴 작대기로 때려가며 공부를 시켰지. 안 맞으려고 꼼수를 써보기도 했지만, 열심히 공부할 수밖에 없었어." 당시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다는 구이동(72) 할아버지가 말했다.
 
당시에도 수준별 수업이란 게 있었다. 한 자, 두 자, 한 줄, 두 줄, 한 장, 두 장. 능력에 따라 하루 공부 양이 달랐다고 한다. 천자문을 다 떼고 나면 책걸이라고 해서 떡을 쪄 서당에서 나눠먹었다고 한다.
 
관동마을의 '수구초심'을 보여주는 일도 있다. 이 마을에서는 행사가 있을 때마다 외지에 나가 있는 자식들이 모두 모인다. 경로잔치나 체육회 등 행사가 있을 때면 한 집도 빠짐없이 자식들이 참석을 한다. 어찌 보면 마을의 전통인 셈이다.
 
얼핏 부족한 것 없어 보이는 관동마을이지만 고민거리는 있다. 산짐승들이다. 멧돼지와 고라니가 밭작물을 훼손하는 바람에 농사를 망치기 일쑤다. "저희들로서는 울타리를 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오후에는 특히 더 많이 나타나는데, 마을이 산짐승 서식처처럼 돼 버렸어요. 이 동물들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어디 없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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