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에 걸려 오후 진료 안하고 소파에서 퍼질러 잤다. 도대체 병원 매출 손실이 얼마야? 병원장이 이래도 되나? 나의 매출이 줄었을 뿐 환자를 옆 과장이 다 봐줬으니 전체적으로 손해는 아니다. 옆 과장 아프면 봐주면 되니까. 체온? 재보지도 않았다. 다만, 약 안 먹고도 견딜만하다. 근처 마트에서 사과와 귤을 사왔다. 비타민C 섭취 목적이 아니라 단지 신 걸 먹고 싶어서. 폐렴이나 신우신염은 아니니 항생제 해열제가 필요하지 않다.
 
그런데 실제 병원에서는 항생제·해열제를 투여한다. 고객(환자)과 종업원(의료진)으로 만났기 때문. 고객이 병원에 왔다는 것은 일단 서비스에 대한 지불의사를 표현한 것. 의료진은 당연히 책임져야 되고 충분한 서비스를 해야 한다. 감기의 대부분은 바이러스여서 항생제가 필요없다. 문제는 과연 이 환자의 감기 원인이 바이러스인지 세균인지 진찰로는 알 수 없다는 것. 또 내원했다는 사실 또한 대부분 '치료를 원한다'는 뜻. "견뎌야겠다"는 사람은 병원에 안 온다.
 
해열제를 맞고 링거 주사에 비타민까지 섞어 맞으면 확실히 좋긴 좋다. 하지만 사실상의 감기 치료 원칙은 원인 제거가 아니라 고통 경감이므로 굳이 병원에 올 필요는 없다. 그런데 감기에 '걸렸다'는 표현은 최근이고 원래 우리말은 '앓다'였다. 100여년 전 <한성순보(漢城旬報)>에도 ' 다'로 쓰고 있다. 화끈한 치료법이 없어서도 그랬겠다. '걸렸다'는 말에는 '걸리게 한 요인의 제거가 곧 치료'라는 암시. 그러나 앓을 때는 앓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푹 자고 나니 컨디션이 좋아졌다. 늦게나마 진료를 했는데 필리핀 감기환자가 왔다. 귤 하나 줬다. 푹 자지 않았으면 과일 하나 건넬 여유도 없었겠다.
 
최근 논문을 보니 감기에 잘 걸리는 사람은 암에 잘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 직원이 "친정아버지가 4~5년간 감기 한번 안 걸리더니 폐암이 발견됐다"고 맞장구를 친다. 또 최근 미국 텍사스대학 연구진은 감기 바이러스로 암세포를 잡는 연구도 하고 있다. 감기에 자주 걸리면 암에 안 걸리는 이유는 감기 바이러스를 스파링 파트너 삼아 싸우면서 자연살해세포(Natural killer Cell)의 면역력이 커진다는 것. 감기에 걸리는 사실이 면역력의 증거도 된다.
 
누나가 학교선생님인데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새로 부임한 젊은 교사는 몽둥이 들고 다니며 학생 생활에 온갖 간섭을 한다. 그런데 교사생활을 오래 하면 담배 피우는 학생더러 '끊어 임마!' 대신에 '몸에 안 좋으니 조금만 펴!'라고 한다." 감기라는 건 면역체계가 지나가는 바이러스를 못본 체 하지 않고 "잠시 검문 있겠습니다"하고 단속하다 싸움이 나는 것.
 
20대 후반 레지던트 때 심한 편도염으로 입원한 적이 있다. 무쇠도 소화시킬 나이라는데 편도염으로 입원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이후 나같은 심한 편도염 환자를 주의 깊게 본 적 있는데 대부분 20~30대 였고 중년 이후 환자는 드물었다. 통계를 내지 않았으니 정확하지는 않지만 감기도 결국 힘이 있어야 걸린다. 골골한 사람이 오래 산다는 말. 골골해서가 아니라 외유내강이다.
 
결론은 감기 여부로 자신의 건강 수준을 판단하는 것은 금물이라는 것. 이거다 저거다 말할 탄탄한 의학적 증거가 아직 부족하다. 감기 때문에 소파에 누워 비몽사몽하면서 여러 생각이 났다. 내가 요즘 과로를 했다는 것과 나도 늙는구나 하는 자각, 그리고 앞으로 인생의 행로까지…. 심각한 병이 아니라면 한 번쯤 걸려 자신을 성찰할 기회를 갖는 것도 좋겠다. 물론 더 중요한 건 그때 생각난 바를 현실에서도 실천하는 일.

저작권자 © 김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