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대성동고분군 6차 발굴조사때 처음으로 확인된 대형수혈식석곽묘 73호분의 개석 노출 상태.

대성동고분박물관 송원영 학예사
73호분 수장급 무덤 등 유물 근거 주장
기존 주류 이론 '남정설' 정면 대치

"금관가야는 고구려의 남정에 의해 멸망한 게 아니며, 그 이후로도 한동안 존속했다!"
 
금관가야(김해)는 서기 400년께 고구려에게 정벌됐으며 이후 고분 축조가 중단됐다는 '남정설'이 학계의 주류 이론이다. 이는 광개토왕비문의 기록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고구려의 남정에 대한 기록이 없으며, 나아가 <삼국사기>에 금관가야가 532년에 멸망했다는 언급이 있다는 점을 들어 이를 반박하는 견해도 존재해 왔다. 이런 가운데, 대성동고분군 발굴조사를 통한 고고학적 자료를 근거로, 금관가야가 400년 이후에도 지속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돼 관련 학계가 주목하고 있다.
 
대성동고분박물관 운영담당인 송원영 학예사는 지난달 10일 부산대 인문관에서 열린 '한국고대사학회 제129회 정기발표회'에서, '광개토왕비 경자년 남정기사의 고고학적 고찰'이란 제목의 논문을 통해 이같이 주장했다.
 
송 학예사는 지난 1990년부터 지금까지 대성동고분군 발굴 현장과 발굴 결과물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는데, 이 결과물들에 따르면 금관가야의 멸망은 고구려의 남정 탓이 아니며, 고구려가 금관가야에 미친 영향 역시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송 학예사는 "고구려군의 금관가야 남정을 전하는 유일한 기록은 광개토왕비문(414년 건립)뿐인데, 일부에서는 이를 근거로 대성동고분군의 축조가 중단됐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면서 "그러나 지난 2011년에 발굴된 대성동 고분 73호분은 5세기 후반 수장급 무덤으로 고구려군의 남정보다 시기적으로 한참 뒤에 조성된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또 대성동고분군 발굴조사를 통해 확보한 중국 삼연계의 갑주류와 무기류 등은, 4세기 대에 금관가야와 삼연의 직접적인 교류를 통해 이입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대성동고분군에서 출토되고 있는 5세기 중엽 이후의 고고학적 자료들을 토대로 판단했을 때, 금관가야의 쇠퇴는 외부의 군사적 정복에 의한 급격한 세력 교체 때문이 아니라, 금관가야를 둘러싼 국제관계와 내부의 역학관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 인제대 역사고고학과 이영식 교수는 "송 학예사의 견해는 대성동고분군에서 5세기 후반의 수장급 무덤이 계속 출토되고 있는 고고학적 사실을 근거로 하고 있으며, 가야사 연구와 관련해서는 기록이 없는 탓에 고고학적 자료가 중시될 수밖에 없다"면서 "송 학예사가 역사학계에 중요한 화두 하나를 던져 놓았으므로, 앞으로 금관가야 멸망에 관한 학자들의 후속 연구가 뒤따를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저작권자 © 김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